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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도 Nov 26. 2022

괌에서 만난 한국인 택시기사 아저씨


여행을 하면서 새롭게 배우는 것은,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의 낯선 삶의 방식이다.


나에게는 동경이나 일탈이 누군가에게는 일상이며, 나의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일탈이나 동경이 될 수 있다.

 

2020년 1월 마지막으로 말레이시아의 페낭을 여행하고, 2년 10개월 만에 가족들과 남태평양의 괌으로 여행을 떠났다.


코로나가 지나간 이후 그곳에서 만난 이들의 삶을 들여다본 이야기를 정리해본다.


첫 번째 이야기는 괌에서 우연히 탄 택시에서 만난 한국인 기사님이다.


아내와 둘이서 택시를 타고 근처 쇼핑몰로 가려던 참이었다.


호텔 컨시어지에서 택시를 요청했더니 호텔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택시 한 대가 우리 앞으로 나왔다.


전통적으로 일본인 관광객이 많은 괌이라 그런지, 택시 기사님들도 일본의 택시처럼 내려서 문을 열어주는 것이 기본처럼 보였다.


우리 부모님보다도 더 연세가 있어 보이시는 기사님 한분이 내렸다.


한눈에 봐도 남태평양의 뜨거운 태양을 수십 년간 받아오며 적응한 짙은 피부색에, 강렬한 태양에도 시력을 보호할 수 있을 짙은 보랏빛의 레트로 스타일 선글라스 너머로 기사님의 눈을 볼 수 있었다.


영어로, ‘Hello’하고 이야기하고 보니 기사님이 물끄러미 쳐다보시더니,


“어디까지 가세요?”


하고 한국말로 물어보신다.


“아, 한국분이세요?” 하고 반가운 마음에 행선지를 말하고 아내와 둘이 택시에 올라탔다.


땀이 많이 나서 시트 관리가 어려운지 괌의 택시의 커버는 대부분 가죽이 아닌 땀을 흡수할 수 있는 듯한 천으로 된 커버가 많았다.


잘은 모르지만 택시 면허증에 있는 기사님의 성은 ‘Lee’였고, 무궁화나 작은 하회탈 같은 장식품들을 보니 해외에서 오래 생활하신 교민분 같았다.


“괌에는 오래 계셨나 봐요 기사님.”


하고 말을 꺼내자 기사님은, 반가우신지


“그럼요 저는 거진 여기 한 40년 정도 살았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괌에 있는 대규모 건설 공사에 대기업 건설사의 직원으로 처음 오셨다고 한다.


공사가 끝난 이후로도 괌에 남아 자식들을 키우시고, 괌 현지에서는 미군들이 자녀 교육을 시키는 괌에서는 최고 좋은 학교에서 자녀교육을 시키셨으며, 자녀들은 장성해서 미국 본토로 넘어가 지금은 LA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고생스러웠던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아련한 듯한 표정을 지으셨지만, 자식들이 좋은 교육을 받고 미국 본토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며 살고 있다는 설명을 하실 때는 가슴 가득 차오르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괌에서는 한인이 한 4천 명 정도 될 거예요. 와서 계속 살 생각으로 오는 사람들도 있고 미국 시민권 받아서 미국 본토로 가려는 사람들도 있고…”


한국에서는 몇 시간 만에 올 수 있는 미국 영토의 관광지라는 느낌이 있지만, 막상 괌에서 사는 사람들은 미국 본토의 변방지역이라는 인식이 강한 것 같았다.


“오키나와에서 미군 병력 5천 명이 철수해서 괌으로 옮기는데, 그 공사를 필리핀 인부들이 하러 들어왔어요, 저쪽 남부 쪽에.”


현지 소식에도 밝으신 것 보니 괌 안에서도 많은 네트워크가 있으신 것 같았다.


“그럼 아무래도 현지 경제도 좀 발전되고 하지 않을까요?”


7년 전 처음 괌에 왔을 때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게 없어 보였는데, 이런 큰 공사나 변화를 계기로 발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내가 한 마디 거들어보았다.


“어차피 미군들은 그냥 자기네 부대 안에서 생활하고 별로 나와서 쓰는 건 없어요. 필리핀 인부들도 뭐 어차피 공사 3년 끝나고 나면 벌은 돈 갖고 자기네 나라로 돌아갈 테고.”


큰 기대를 하지 않으시는 것 같았다.


“그럼 기사님은 괌에서 사모님이랑 두 분이서 계시는 거예요?”


문득 기사님의 현재 삶이 궁금했다. 조금은 실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여쭤보았다.


“맞아요. 이제는 애들 다 엘에이 가서 살고 저랑 마누라랑 둘이만 괌에 있죠.”


짐작한 대로 괌에서 오랫동안 사셔서 그런지 괌에서 노년 생활을 차분히 즐기시고 계신 것 같았다.


“한국에 들어가실 생각은 없으세요?”


뭔가 자신감을 얻어 괜한 질문도 한번 해봤다.


“글쎄요. 같이 괌에 살던 친구들은 많이들 들어갔는데, 나는 그냥 여기서 사는 게 편해요. 안 그래도 우리 와이프도 한국 들어가더니 괌에 안 들어오고 싶다고 지금 안 들어오고 한국에 있어요.”


“아무래도 한국 가면 또 편한 게 있죠.”


괜히 한번 거들었다.


“괌에 살던 친구들은 제주도에 가서 많이 살아요.”


그러고 보니 괌과 제주도가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아 제주도에서는 뭔가 분위기가 비슷하겠네요!”


하고 껴들었다.


“그것도 그런데 한 10년 전 얘기고 지금은 제주도도 너무 올라서, 지금은 가기 힘들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렇긴 하죠. 요새는 속초나 양양 쪽으로도 많이들 가시더라고요.”


속초에서 노후 생활을 즐기고 계시는 처가 부모님 생각이 나서 또 한마디 거들었다.


하지만 구릿빛 피부의 기사님은 너무나도 괌에서의 삶이 어울리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특별히 내 이야기가 기사님의 삶을 바꿀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자식 뻘의 젊은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것이 너무 즐거우셨는지, 신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이윽고 우리가 목적했던 쇼핑몰에 왔다. 미터기의 요금은 19불이 조금 넘었다. 보통은 1-2불 정도의 팁을 포함해서 20불 정도 내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18불만 내세요.”


하고 기사님이 기분 좋게 말씀하셨다.


나는 20불짜리 지폐를 꺼내서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20불 받으세요.”


하고 지폐를 쥐어드렸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기사님이 정말 내가 더 드린 2불 때문에 고맙다고 하시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다만 이역만리에서 동포 젊은이를 만나 이런저런 살아온 이야기를 나눈 시간이 즐거워서 그러셨을 것이다.


나 역시도 택시를 타고 잠깐이나마 기사님의 괌에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 애환과 기쁨을 잠깐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언제 또 뵐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기사님 손을 가볍게 악수하듯 감싸며,


“건강하시고요. 행복하게 지내세요.”


하고 기도하듯 인사를 했다.


기사님은 괜히 한번


“어디 두고 간 거 없나”


하고 차 안을 둘러보시더니,


“됐습니다. 잘 들 들어가세요!”


하고 반갑게 인사해주셨다.


괌에서 여행의 시간이 매우 행복해서 괌에서 사는 것은 어떨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으로 40년간 살아오신 기사님과 대화하며 잠깐이나마 그 삶에 대해 느낄 수 있었다.


모쪼록 기사님이 건강하시길 바라며,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나의 삶에 대해서 뿌듯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괌의 저무는 태양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시던 밝은 웃음의 기사님 덕분에 나의 괌 여행에 대한 기억이 보다 더 의미 있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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