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
시애틀에서는 몇 시간 공항환승이 전부였지만 꽤나 좋은 인상이었다.
어린 시절 기억에 남아있는 캐나다 밴쿠버 외곽의 전원 풍경이랄까, 끝이 뾰족한 침엽수 숲과 파란 하늘이 왠지 모를 청량감을 주는 것 같았다.
비행기를 기다리는 탑승구 앞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왠지 아메리카 원주민도 많이 보였고 아시안도 많이 보였다.
어느 가족은 딸과 할머니와 함께 여행 중이었는데 아빠가 티셔츠에 ‘아빠’라고 한글로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어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같이 온 할머니는 손녀딸에게 음식을 먹여주기 위해 챙기는 모습이 우리 엄마나 장모님이 우리 애들 어릴 때 챙겨주시는 기억이 났다.
어느 나라나 손녀손자를 예뻐하시는 할머니의 마음이 느껴져서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비행기에 타자마자 나는 정신을 잃고 잠이 들었다. 정말 정신을 잃고 잠이 들었는데 뒷사람이 코 고는 소리에 내가 고는 소리인 줄 알고 깼다. 진짜 내가 골았을 수도 있다. 같이 골았을 수도 있고.
한 시간 정도 졸다가 일어났고, 지금은 아직 목적지인 덴버까지 한 시간 남짓 남았다.
창가자리에 배정받아 중간중간 창밖 풍경을 보고 있지만 특별할 것 없다.
옆자리에는 아이가 없는 부부 같은데, 미국인 중에 종종 만나게 되는 특유의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배려와 적당한 무관심으로 옆 자리 사람으로서 참 편한 느낌의 사람들이 앉아 있다.
시애틀에 살고 있는 친한 형이 언젠가 한번 한국에 왔는데, 머리를 기르고 나타난 적이 있다.
키도 크고 덩치도 커서 아쿠아맨을 연기했던 제이슨 마모아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시애틀에 그런 느낌을 풍기는 사람이 많이 보이는 걸 보니 그 형도 시애틀에 살면서 이런 스타일을 하게 된 게 아닌가 싶다.
잠시 시애틀 공항에서 봤던 버스킹 풍경이 떠올랐다.
목소리만 들었을 때는 젊은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백발의 노인이 멋진 모자를 쓰고 긴 머리에 멋진 긴 수염을 뽐내며 기타 연주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냥 말하듯이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적당히 목소리에 힘이 있고 너무 무리해서 힘을 주어 노래 부르는 느낌은 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완급조절에 익숙해져서일까? 젊은 가수가 목청 터져라 부르는 노래가 듣기 좋을 때도 있지만, 완급조절에 능숙한 연륜 있는 가수의 편안한 노래도 듣기 좋다.
잠깐 공연을 즐기고 싶어 커피로 유명한 시애틀의 커피 한잔을 사서 자리를 잡았다. 맛있는 커피는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정석이겠지만, 나는 아이스아메리카노가 마시고 싶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커다란 창밖으로 파란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멋들어진 공연까지 즐기니 시애틀은 꽤나 좋은 동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공항에서의 풍경을 회상하다가, 비행기 앞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굉장히 큰 소리로 쉼 없이 떠드는 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그 아주머니의 옆자리에는 모르는 사람들 같은데 그 아주머니의 쉴 새 없는 수다에 상당히 피곤해하는 표정이다.
아까 공연을 즐기기 위한 커피를 마신 것까진 좋았는데, 커피의 이뇨작용은 좀 조심할걸 그랬나.
창가자리에서 화장실을 가자니 상당히 불편하다.
일단은 좀 참아봐야겠다.
한 참 글을 쓰니 잠이 온다.
화장실도 참아볼 겸 잠시 잠을 청해봐야겠다.
잠이 드는 것에 실패하고 결국 옆사람들에게 매우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에 다녀왔다.
상당히 친절하게 자리를 비켜줬다.
다녀오니 상당히 편하다.
이제 남은 40여분의 비행시간을 좀 편안히 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