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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도 Mar 09. 2020

낯선 땅, 900일간의 일지

코이카 국제봉사단원으로 보낸 시간

2006년 8월, 인도네시아 북부 수마트라주의 수도 도시인 메단. 22살의 나는 정장을 입고 커다란 이민 가방과 배낭을 메고 공항 밖으로 나왔다. 숨이 턱턱 막히는 듯한 푹푹 찌는 더위와, 공항 앞에 진을 치고 앉아 있는 택시 기사들의 매캐한 정향 냄새 가득한 담배 연기가 나를 맞아주었다. 나를 마중 나오기로 한 파견 기관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고, 연락도 되지 않았다. 한 시간 넘는 시간으로 느껴졌던 한 15-20분 정도 나는 마냥 그 자리에서 기다렸고, 마침내 파견기관 사람이 오고 있다며 전화를 했다. 별로 미안하거나 급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생각했다. '아 여기서 2년을 살아갈 수 있을까? - 솔직히 속으로 쌍욕도 했다.
 
2006년 11월, 우기의 끝나지 않는 비와 하루에 4번씩 3번이나 정전이 되는 집에서 나는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한국에서 한 번도 보지 않았던 책을 몇 번이고 읽었다. 아주 재미있게. 최악의 번역을 이야기할 때 항상 거론되는 '위대한 개츠비'. 하지만 정전으로 선풍기도 켜지 못해 덥고 습해서 잠들 수 없는 밤에 읽는 이 책은 너무나도 재미있었다. 비가 오면 부엌엔 항상 비가 샜지만, 이제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 내일 아침 집 앞 길은 물에 잠겨있겠지. 나는 이 곳의 느린 속도에 맞추어져 가고 있었고, 자연의 위대함을 거스를 수 없음과 인간의 뛰어난 발명품들의 고마움에 대해 새삼 느끼며 살아가고 있었다.
 
2007년 3월쯤인가, 매해 3월이 되면 새 학기가 시작되어왔고, 새싹의 푸르름은 희망찬 느낌으로 내게 다가오곤 했었다. 하지만 이 곳의 3월은 그냥 계속되는 여름이다. 여전히 전기는 나가지만 살만했고, 현지 언어도 그리 불편하지 않게 쓸 수 있게 되었다. 파견기관은 여전히 불안정하고 업무는 들쑥날쑥하지만 어느 정도 자리도 잡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계속 빠지던 살도 다시 좀 붙기 시작했다. 새삼 메단에 처음 오던 날 '이런 데서 2년을 살아갈 수 있을까?' 문장으로 일기를 썼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 다음 문장을 기억해냈다. '하루하루 눈 앞의 삶을 집중해서 살자, 그러면 점점 살만해지지 않을까?'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힘들 때면 스스로에게 하셨던 말씀이셨다. 실제로 7개월이 지나 나는 제법 살만했다. 다혈질에 욱하는 성격 급한 사람이 느긋하고 여유로운 사람으로 바뀌었다. 서둘러도 되지 않는 일도 많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런 것에 일일이 화내고 스트레스받는 사람은 이 동네에 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살만해진 것 같다.
 
2007년 6월, 봉사단 국내 훈련 때 1년 뒤 내게 쓴 편지가 도착했다. 설렘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1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나를 위로하기 위해 쓴 글들이 있었다. 난 이미 알고 있었구나 생각했다. 설렘과 두려움으로 가득 찼지만 결국에는 잘 지낼 것이라는 것. 스스로 힘든 것 때문에 끙끙 앓고 있을 나에게 위로의 말을 해주는 것. 가슴이 먹먹해졌다. 국내 훈련 때 배웠다. 1년 정도 되면 현지 적응이 어느 정도 끝나서 고향도 그립고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어질 수 있다고. 비슷했다. 정신없이 적응하고 나니 문득 힘든 감정들이 몰려왔다. 난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가. 벽에 걸어놓은 태극기를 쳐다보고, 남은 1년 반을 어떻게 살까 생각했다.
 
2007년 9월, 일을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는 길. 이슬람의 '마그립'이라고 하는 시간이다. 저녁 6시에서 6시 반 사이에 마그립을 알리는 이슬람 사원의 '아잔'소리도 이제는 익숙하다. 양쪽으로 논과 야트막한 집들이 펼쳐진 지평선으로 둘러싸인 아스팔트 길(여기저기 구멍이 나고 들쑥 날쑥한)이 나의 퇴근길이다. 서쪽 하늘에서는 해가 지며 붉게 타오르는 저녁노을로 가득해지고, 동쪽에는 이미 깜깜한 밤에 달과 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완벽한 석양과 밤의 그러데이션. 문득 숨이 막힐 정도로 감격스러웠다. 평생 이 풍경 속에서 내가 느끼는 다섯 가지의 감각을 잊어버릴 수 있을까? 귀국까지는 1년도 채 남지 않았다. 매일 일상의 풍경은 바뀌니까, 이 풍경을 평생 볼 수 있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순간을 내가 누릴 수 있음에 감사했다.
 
2008년 6월, 이제 두 달 뒤면 귀국이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복학도 해야 하고, 취업준비도 시작해야 하고, 별의별 생각에 불면증이 오기 시작했다. 2주 정도를 거의 하루에 2-4시간만 잤다. 영화 '파이트 클럽'에서 에드워드 노튼의 대사처럼 '깨어있는 것도 아니고 잠들어있는 것도 아닌' 그런 시간들이 계속됐다. 이제 그냥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여기를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다시 오기는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동네를 걷고, 자주 찾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귀국할 때 부모님 선물은 어떤 것을 할까? 그동안 현지에서 사귄 친구들도 챙겨서 만나고 이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떠나야 하는 시간은 온다. 올 때 목표가 생각났다. '열심히 살아서 떠날 때 이 곳을 떠나는 것에 아쉬움을 느낄 정도의 애정을 갖자'. 지금 생각하면 '애증'이라고 해야겠다. 정말 그리운 부분이 있는가 하면, 지금 생각해도 지겹도록 싫은 부분도 있다.
 
2008년 11월, 한국의 겨울은 오기 시작했다. 온 세상에 에어컨을 틀어놓은 것처럼 시원하고 쾌적했다. 교육 때 배운 대로 '카운터 허니문(Counter Honeymoon)' 기간이다. 한국이 다 좋고, 마냥 좋다. 복학을 준비하며 아르바이트도 하고 있었고, 치맥도 먹을 수 있고 편의점에서 구경하는 것만도 기분이 좋았다. 지하철을 가끔 거꾸로 탔지만 서울의 풍경도 발전한 도시의 모습으로 매우 자랑스러웠다. 인도네시아에서 '느긋함과 여유로움'을 배워온 나는 차츰 도시의 분주함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이 곳에서도 마음은 느긋하게 갖고 살 수 있다는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문득, 한국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지며,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2년 넘게 살았다고?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난 시간들은 추억 속으로 빠르게 잊혀 갔다.
 
2009년 12월, 졸업 전 운 좋게도 취업할 회사가 확정되어 바빠지기 전에 내가 살던 메단에 다시 가보기로 했다. 저가 항공 티켓을 잘 구해서 떠난 지 1년 4개월 만에 메단으로 갔다. 한국에서 내가 언제 인도네시아에 갔었나 싶은 느낌이 들었다면, 이 곳에 돌아오니 내가 이 곳을 떠났었나? 싶을 정도로 익숙했다. 풍경은 별로 변함이 없었고, 잊고 있던 단어나 길 이름까지도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니 떠올랐다. 자전거 바퀴가 두 개인 것처럼, 내 삶의 두 개 바퀴가 하나는 한국, 하나는 인도네시아에서 굴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바퀴가 굴러가듯 나의 삶도 계속 앞으로 가고 있다.
 
2020년 3월, 여름이면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차에, 언제든 전화비 걱정을 하지 않고 듣고 싶은 가족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전화 한 통이면 내가 먹고 싶은 한국 음식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더 이상 여기저기 고장 난 길을 자전거를 타고 달리지 않아도, 전기가 나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으며, 비가 아무리 와도 천장에서 물이 샐 걱정을 하지 않는 삶에서 그 시절의 기억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기억이다. 나 인생에서 가장 느린 시간이었지만, 내 스스로 많은 생각을 하고 배웠던, 진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들. 지금도 내 인생에서 가장 운이 좋았고, 또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시간. 그때 아니면 못 배웠을 많은 삶의 모습과 태도. 이후에도 살면서 많은 힘든 일들과 좌절을 겪었지만, 그 시간들을 이겨내고 굳건히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던 것은 십 수년 전 900여 일간의 코이카 단원으로 그곳에서 보낸 시간 덕분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눈을 감으면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봤던 양쪽 지평선 너머의 낮과 밤이 공존하는 커다란 하늘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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