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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도 Jan 03. 2021

5천 원에 명품가방을 준다고?

랜덤박스 개미지옥에서 빠져나왔다

몇 달 전, 인스타나 페이스북에서 5천 원에 명품 가방에 명품 가전들을 살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광고를 보았다. 정말 말도 안 되지만 이게 뭔가 싶어서 어플을 깔아 두고는 한 참을 잊고 있었다. 


너무너무 심심한 어느 날 밤, 다시 또 페이스북에서 랜덤박스를 통해 5천 원으로 명품가방을 가질 수 있다는 광고가 나왔다. 정말 정말 한심한 생각인 줄은 알지만, '5천 원에 샀는데 정말 명품 가방이 나올 수도 있잖아?'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다지 명품가방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되팔면 현금이 얼마냐는 생각에 회원가입을 하고 구매를 하게 되었다.


1. 첫 번째 랜덤박스 오픈!


랜덤박스를 오픈하는 것은 어플 상에서 온라인으로 바로 확인이 가능했다. 랜덤박스를 구매하면 배송이 되어 두근두근 열어보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에서 바로 확인이 가능하다니 배송될 때까지 괜히 기대하고 기다렸다가 열어보고 실망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다고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나의 아이템은 - '한방 도라지 차'. 평소 헛기침이 많이 나서 도라지청을 한번 먹어볼까 생각했는데, 나쁘지 않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다지 먹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정가는 18,000원이라고 쓰여있는데, 의심병이 도져 최저가를 검색해보니 정말 같은 회사의 상품이 18,000원이다. 사실 첨가물이 든 거나 성분 좋은 거 엄청 따지는 나라서, 성분을 보니 성분이 나쁘지 않다 (인공 첨가물이 없었다). 그냥 먹어볼까 했지만, 나의 헛기침이 이 도라지차로 나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2. 두 번째 랜덤박스 오픈!

한 개 더 사보자. 만원까지 써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신규회원 가입으로 500원 쿠폰을 받아서 9,500원을 쓴 거다. 한 번 더 구매를 했다. 명품 가방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것들도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거라도 받자. 두근두근. 두 번째는 '김부각 튀김'이었다. 정가는 8,000원이라고 쓰여있다. 태어나서 한 번도 8천 원을 내고 김부각 튀김을 사 먹어본 적이 없다. 


3. 포인트 교환, 그리고 세 번째 랜덤박스 오픈!

두 개의 아이템이 나의 랜덤박스 상품 보관함에 있다. 18,000원 자리 도라지차, 8천 원짜리 김부각 튀김. 합이 26,000원이라니, 9,500원을 투자하고 배송을 받으려면 따로 내야 하는 배송료 3천 원을 더해도 2배 이상의 가치가 있다. 다만 내가 원하는 상품이 아니기에, 26,000원을 현금으로 되돌려 받는 것이 아닌 이상 나에게 26,000원 혹은 실투자금 9,500원의 가치는 나에게 느껴지지 않았다. 원하지 않는 상품이 나올 경우 다시 포인트로 환급을 받을 수 있었다. 한 개당 2,500원씩. 나에게 있는 두 개를 환급받으면 5,000원으로 다시 한번 랜덤박스를 구매할 수 있다. 그래, 한번 더 해보자. 세 번째 랜덤박스 오픈 - 두구두구 - '핸드폰 충전 마우스패드' 정가 '34,500원'. 그나마 지금까지 나온 것 중에서는 가장 내가 쓸 것 같았다. 하지만 작년인가 회사에서 전 직원들에 핸드폰 충전 마우스패드를 지급한 적이 있어서 아주 잘 쓰고 있었다. 굳이 이걸 또다시 사는 것은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의 의심병은 다시 최저가 검색을 하게 만들었고, 인터넷 최저가는 2만 원 초중반에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도 9,500원 투자하고 그 이상의 가치를 찾은 것 같아 마음이 좋았다.


4. 랜덤박스 속의 랜덤박스. 트레이딩 코너

'타짜'에서 '아귀'가 무서운 것은 도박 속의 도박을 즐기는 것 때문이라고 고광열이 얘기했었나. 랜덤박스 안에서의 개미지옥은 바로 이 트레이딩 코너다. 이 공간은 본인이 보유한 랜덤박스를 물물교환을 위해 올리고, 사람들과 물물교환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공간이다. 생각보다 많은 종류의 물건들이 있었고, 나의 휴대폰 충전 마우스패드보다는 더 좋아 보이는 것들과 값나가는 것들이 보였다. 그 와중에 명품 가방을 교환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내가 원하는 상대방의 아이템을 선택하고, 내가 맞교환하고 싶은 나의 아이템을 선택하고 교환을 제안하면 상대방이 수락/거절을 통해 거래가 성사되거나 불발이 된다. 빨간색 클립 하나로 계속해서 물물교환을 통해 집 한 채를 얻게 되었다는 미국의 어느 한 소년의 이야기도 떠올랐다. 내 물건의 가치가 35,000원이니 한번 교환할 때 5천 원씩만 올리면 더 비싼 걸로 바꿀 수 있을 거라는 허무맹랑한 기대감으로 나는 트레이딩의 개미지옥에 빠지게 되었다. 


5. 첫 번째 받은 제안, 수락, 절망의 시작

자고 일어났는데 제안이 와있었다. 무려 6만 원짜리 천연성분 화장품. 고급스러워 보였고, 인터넷 최저가도 5만 5천 원 정도였다. 여성용이고 와이프가 쓸 것 같지도 않지만 6만 원 가치라면 그걸로 다른 사람과 더 좋은 것으로 교환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 '수락'을 눌렀다. 9,500원을 투자해서 6만 원짜리를 갖게 되다니! 엄청 돈을 번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이 가치를 키워서 더 좋을 물건으로 바꿔야 한다. 최소한 내가 필요한 물건으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무선 찜질 기계, 메모리폼 베개 2개 세트 정도가 눈에 들어왔다. 그 외에 눈 마사지기, 가습기 등도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내 물건의 가치가 더 큰 데도 불구하고 번번이 거절을 당했다. 아뿔싸! 이 곳에서 화장품은 환영받는 품목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그 돈을 주고 살 것 같지 않는 화장품들이 많았고, 대부분 아직 인지도가 낮은 상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성분을 보면 나쁘지 않은데, 굳이 내가 이 돈 내고 살 것 같지 않은 그런 제품들이었다. 짐작해보건대 아직 인지도가 낮은 화장품 브랜드 제품들이 랜덤박스에 물건을 협찬해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물건을 사용하게 한다는 마케팅 수단?이라고 생각하면 이야기가 맞아떨어진다. 진위 여부는 모르지만 이쯤까지 생각이 들자 6만 원짜리를 나의 34,500원짜리 마우스패드와 바꾸자고 한 사람한테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고나라에서 찾아보니 이 화장품의 거래는 2만 원 정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잘 팔리지 않는 것 같았다. 제품 트라이얼 마케팅 용으로 랜덤박스에 협찬한 마케팅 담당자는 중고나라에 정가의 반도 안 되는 가격에 물건이 잔뜩 올라와 제품 이미지만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을까 하는 괜한 오지랖 넓은 생각이 잠깐 들었다. 


6. 드디어 두 번째 교환!

화장품과 가전제품은 생각보다 교환이 힘들었다. 나는 생각을 바꿨다. 내가 쓸만한 화장품을 찾아보자. 남성용 중에 괜찮아 보이는 화장품을 물색했다. 처음 보는 브랜드지만, 설명상 성분이 좋고 향이 좋고 나의 피부 타입이나 생활 습관에 맞는 제품을 선택했다. 가격은 34,900원. 물론 내가 그 돈을 주고 구매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인터넷 최저가도 25,000원 정도에 형성되어 있었고, 마침 요새 피부가 거칠어지는 것 같아 와이프 에센스를 가끔 몰래 썼는데 이걸 하나 구해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미스트 타입이라니 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여자 프로필 사진이 있는 아이디의 사람에게 물물교환을 신청했다. 내가 보유한 아이템은 여자 화장품이고, 내가 원하는 것은 남자화장품이니 확률이 더 높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결과는 '수락'. 백 번이 넘는 제안 끝에 내가 필요 없는 6만 원짜리 화장품에서 2만 5천 원의 가치는 하락(?)했지만 내가 원하는 제품을 얻게 되었다. 


7. 제품 배송신청, 개미지옥 탈출!

더 이상 트레이딩을 하다가는 이 개미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3천 원의 배송료를 내고 제품 배송을 신청했다. 2-3일 뒤에 물건을 받을 수 있단다. 마음 같으면 이 어플을 삭제하고 싶지만 제품을 제대로 배송받을 때까지는 갖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문득, '5천 원으로 랜덤박스 구매' 버튼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나는 다시 랜덤박스를 구매할 것 같다. 


8. 내가 랜덤박스 회사 운영자라면 - 전략기획 공짜 컨설팅해줄게요 담당자님

일단 이번 개미지옥 경험을 통해 느낀 것은, 이 업체는 아직 영세한 업체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 하지만 이 업체의 강점이 매우 명확하다는 것이다. 트래픽이 굉장히 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업체는 앞으로 투자해야 할 부분과 나아가야 하는 방향성은 명확하다. 


 1) 투자해야 할 부분- 일단 트래픽이 몰리는 것을 감당할만한 서버 사이즈가 안된다. 서버에 투자해야 한다. 속도가 느려서 이게 무슨 모뎀으로 PC통신하던 시절 느낌이다. 트래픽이고 뭐고 일단 유저 인터페이스가 느리면 사람들 다 떨어져 나간다. 돈 좀 쓰시라.


 2) 수익모델 정리 - 현재 재무구조를 보지는 못하지만 짐작건대 대부분의 랜덤박스 구매 수익이 6-70퍼센트는 될 것 같다. 한 사람이 1개의 랜덤박스를 사서 그것만 소비한다면 그 정도의 수익은 안 되겠지만 포인트로 재교환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고, 배송신청 기한을 지나쳐서 포인트로 재환급받는 사람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직은 신규 유저를 모으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한번 들어온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재구매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 외에도 현재 트라이얼 마케팅을 위해 업체에서 협찬받는 제품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트래픽이 더 커진다면 트라이얼 마케팅을 하는 데 있어 광고비 명목의 수익 창출도 앞으로는 커질 것이다. 


 3) 상생 관계 구축과 긍정적 회사 이미지 향상 - 대부분의 제품이 중소기업 혹은 신생 브랜드의 제품이기 때문에, 사실 '착한'브랜드를 좀 더 홍보해주고 영세업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을 계속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또한 수익의 일부를 사회사업에 투자한다던지 하는 부분들이 현재 '사행성을 조작하는 듯한' 랜덤박스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전환해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일이 라고 생각된다 - 돈을 잃어도 최소한 내가 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데 돈을 썼구나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으니까.


 4) 관련 규제 확인 - 당연히 했으리라 생각해서 제일 마지막에 넣기는 했는데, 혹시라도 이 랜덤박스 구매가 '경품'의 형태로 해석될 경우 22퍼센트의 '제세공과금'을 수익자가 내야 한다. 나중에 회사가 더 커지고 나서 이런 문제가 생긴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이 부분은 초반에 최대한 명확하게 해 놓는 것을 추천한다.


0. 그래서 앞으로 또 랜덤박스를 구매할 것인가?

앞으로도 랜덤박스를 구매할 것 같다. 하지만 좋은 것이 나올 때까지 랜덤박스를 구매하기보다는 트레이딩 기능을 적극 활용해서 내가 원하는 제품으로 교환해서 쓰는 것이 더 사용자 입장에서는 좋은 것 같다. 한 달에 한두 개 정도 랜덤박스를 사서 가끔 교환 제안하고 필요한 제품으로 바꿔서 쓰면 좋지 않을까 싶다. 오래간만에 남의 회사 전략까지 생각하면서 몰입해서 즐거운 경험을 했다. 그래서 한번 글로 남기고 싶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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