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아저씨의 남한 생활 적응기
모처럼 도서관에서 여유롭게 목적하는 책을 찾는 것이 아닌, 보고 싶은 책을 여유롭게 고를 기회가 있었다. 지나치다 눈에 들어온 책 제목 '태영호의 서울생활'. 몇 년 전 남한으로 망명했다던 북한 외교관이자 강남에서 국회의원이 됐던 그 아저씨가 아닌가. 문득 그가 본 서울과 나에게 익숙한 서울은 어떻게 다를까 궁금한 마음이 생겼다. 가끔 나에게 익숙한 것을 낯선 이의 시선으로 봤을 때 나의 일상이 새롭게 느껴지는 경험을 했던 나로서는 흥미롭게 느껴졌다. 책장에 꽂혀있는 책 디자인은, 책의 정면이 아닌 얇고 긴 제목만 있는 부분을 봤을 때는 영락없는 북한의 선전문구 같은 레트로풍의 디자인이었다. 붉은 바탕의 검정테두리의 흰색 글씨라니, 여전히 북한 출신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의를 끄는 것이 필요했던 것인가, 소위 '어그로'를 끌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빠르게 하며 책을 집어 들었다. 표지의 그림은 '태영호의 서울생활'이라는 제목만 없다면 그냥 한국 아저씨의 산문집 표지 그림 같았다. 별 의미 없었을 수도 있겠지만 만족하고 있는 일러스트 인물의 표정은 그의 서울 생활은 전반적으로 만족스럽구나,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티비에서 봤던 그의 망명 소식이 기억났다. 기억이 맞다면 초반에는 'Te YongHo'라는 영문으로 나왔고, 국문 이름은 '태용호'라고 추측된다는 기사들이 많이 나왔고, 이후 '태영호'라는 이름으로 확인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던 것이 기억났다. 유럽에서 오랫동안 외교관 생활을 하고, 망명 직후에는 런던의 영국대사였으니 '귀족'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던 것도 기억났다.
책 속의 그의 이야기는 평균의 북한 주민의 시선과 경험은 절대 아니다. 북한에서는 고위층 집안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 외교관까지 되었으니 평균을 훨씬 웃도는 삶이었을 텐데도 그가 책 속에서 담담하게 묘사한 북한에서의 삶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힘들게 느껴졌다. 하루에 몇 시간 정도밖에 전기가 공급되지 않고, 전기가 공급될 때만 물이 공급이 된다던가, 계좌 개설을 할 수 없어 현금을 가지고 다니면서 결제를 해야 한다던가 하는 등. 어찌 보면 국가와 사회의 기본 '인프라'가 없는 곳에서의 평균을 훨씬 웃도는 삶에는 너무나도 명백한 한계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양 옥류관 냉면 이야기나 대동강 맥주에 대해 설명한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얼마 전 티비에서 '냉면 랩소디'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정말 맛있는 냉면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고, 그 프로그램에서도 평양 옥류관의 냉면에 대해 이야기하는 출연자들의 대화가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대동강 맥주는 한 번인가 수년 전 중국에 있는 북한 식당에서 들쭉술과 함께 마셔본 기억이 있는데, 매우 탄산이 강하고 깔끔한 뒷 맛의 드라이하고 맛있는 라거였다는 기억이 난다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미화되었을 수도 있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나 영화 '백두산'의 현실성에 대해서 북한 사회나 지도층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 있는 그가 평가한 대목도 흥미로웠다. 마치 북한 사람들이 이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하겠구나 느낌이 왔기 때문이다.
최대한 편하게 독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힘을 빼고 쓴 글이라고는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들었던 의문은 '통일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였다. 벌써 60년 세월 동안 다른 체제 속에서 살아오면서 정치, 경제, 문화, 의식 등 모든 것에서 너무나도 달라져있다. 서로 같은 언어로 (이 마저도 100% 알아들을 수는 없겠지만) 대화할 수 있다는 것 외에는 너무나도 달라진 남한과 북한이 과연 어떻게 통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과거 소비재 회사에서 영업부서에 근무를 할 때 선배분들이 통일이 되면 북한에 가서 대리점을 차려서 신규 매장에 입점을 하면서 매출을 늘리고 싶다는 이야기를 우스갯소리로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당장 신규 매장 개척보다도 전기 공사, 도로, 철도, 통신, 의료시설, 수도시설, 교육 등 거의 모든 사회 인프라를 새롭게 구축해야 하며, 중국과 러시와와 접경을 하게 되면서 정치, 외교적으로도 재정비해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으며, 과연 이런 것들이 얼마나 걸리고 어떤 자본을 통해 할 것인지, 과도기의 부작용들은 어떻게 관리하고 융합해 나갈 것인지 등, 도저히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들로 머리가 가득해졌다. 이러한 숙제들이 계속해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게 되면 더욱 힘들어질 텐데, 과연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역 세대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답 없는 질문을 스스로 되뇌며 오랜만의 독후감을 마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