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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 순례 ③ 고공단보와 기산 아래의 주원(周原)上

세종의 용비어천가의 배경

by 뜨끈한 콜라

황토고원과 기산


시안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외곽으로 향할 때면, 저는 천카이거의 영화 '황토지'를 떠올리곤 합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이 영화가 생각납니다. 그만큼 이 영화가 저에게 남긴 인상은 강렬했습니다.


https://youtu.be/2hdHc1kIS3A?si=GBFG2UzIjju8BOi6 찐리뷰- 유튜브의 황토지 리뷰


섬서성의 시골은 여전히 척박합니다. 물론 그때만큼은 아니겠지만요. 그런데 어째서 이 나라는 ‘황토지’, ‘인생’ 같은 위대한 영화를 다시는 못 만들어내고 있을까요, 어째서 이 도시 시안은 청년 천카이거, 젊은 장이모우를 더 이상 배출하지 못할까요. 너무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황토고원의 척박함은 여전히 위대한 예술의 원천이라 할 만한데 말입니다.

2023. 1. 15 주원유적지


오늘의 목적지는 고공단보의 주원 유적입니다. 가는 길이 전형적인 황토고원의 질감은 아닙니다. 기산에 가까워질수록 땅이 푸릇푸릇해진다 싶더니 곧 소박하고 고요한 들판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차에서 내려 기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성소에 들어온 듯 마음이 경건해집니다.


2023. 1. 15. 주원 궁궐 터에서 바라본 기산


주원(周原)은 단순한 고대 유적지 이상입니다. 이곳은 '덕(德)'의 발상지이자, 희씨 일족들이 왕업의 기초를 닦은 땅(帝業之地)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소박하고 깊은 종교적 영성을 느낄 수 있는 장소입니다. 정도전을 비롯한 고려의 열혈 청년들의 이상과 열정이 기원된 곳이기도 합니다.


중원의 고공단보와 중근동의 아브라함


3,000년 전 고공단보는 그들 부족의 근거지인 빈(豳) 땅을 포기하고 미개척지인 기산(岐山) 아래 주원(周原)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이는 오로지 백성들이 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빈털터리로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 덕(德)분에 그는 '덕(德)'의 원조가 될 수 있었습니다.


2023. 1. 15. 오른손은 점사를 위한 거북껍데기를, 왼손은 나무 쟁기를 들고 있는 고공단보. 그가 종교지도자인 동시에 농경 개척자임을 상징한다.


고공단보의 ‘덕’은 세대를 거쳐 이어 내려오며 무르익어, 마침내 그의 손자인 문왕 대에 드디어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천명은 상나라를 정벌하고 상나라를 대신하여 덕으로써 백성을 다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은 유대·기독교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신앙의 여정과 흥미로운 유사성이 있습니다. 4,000년 전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은 오직 여호와 신의 약속(베리트, בְּרִית)만을 의지하여 고향을 떠나 척박한 광야로 향했습니다.


여호와 신은 아브라함에게 당시의 기준으로는 황당하다고 할 법한 미션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보상을 제시했습니다. 대대손손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순종하고 약속의 징표인 할례를 받는다면, 하늘의 별처럼 자손을 번성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고공단보와 그의 후손들이 ‘덕’을 쌓아 ‘천명’을 받았다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유일신’에게 순종하여 ‘선택’을 받았습니다. 두 전통 모두 풍요의 소산에서 비롯된 쾌락을 배제하고 신(하늘)의 명령에 따라 도덕적인 영성을 추구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쾌락 또는 고통에 휘둘리며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던 이들이 보기에는 그들의 행로가 영 황당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고공단보와 아브라함은 각자의 전통 속에서 신앙의 조상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그들의 영성은 동양과 서양 정신사의 중요한 기원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전통은 오늘날 우리의 정신세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세종대왕의 용비어천가


고려의 신진사대부들은 본토에서는 이미 그 원형이 희미해진 주나라의 정신을 다름 아닌 한반도에서 재현하려고 했습니다. 역성혁명은 일단 성공하였으나, 리더인 정도전의 실각과 함께 큰 위기에 봉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꿈은 좌절되지 않고 세종 이도를 통하여 완수되었습니다.

주나라는 ‘예악의 나라’였습니다. 세종은 그 ‘예의’와 ‘음악’을 이 땅에서 성취하고자 하였습니다. ‘예의’야 그렇다 해도, 한 번 사라진 ‘음악’은 되살린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테잎같은 저장매체가 존재하던 시대가 아니니까요. 그러나 세종은 끝내 해내고 말았습니다. 그는 종묘제례악을 조선 고유의 방식으로 복원시켰습니다. 정확한 음을 확보하기 위해 악보도 새로 만들고 조선 땅에서 길러낸 재료로 악기를 만들었습니다. 나아가 고유의 글자인 한글을 창제하였고, 이어 한글로 이용하여 노래를 창작하였습니다. 그 노래의 이름은 바로 ‘용비어천가’입니다.


용비어천가는 이안사라는 인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의 고향은 애초 전라북도 전주였는데, 이안사가 고향을 도망치듯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관기를 건드렸기 때문이지, 그에게 고공단보나 아브라함처럼 다른 멋진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동북면으로 이주한 이후 그는 원나라에 붙어 천호장(다루가치)으로 임명받았으며, 이자춘(이성계의 부친)에 이르기까지 백여 년간 원나라에 충성하며 벼슬을 세습하였습니다.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할 순 없습니다.


용비어천가는 중원의 역대 제왕들의 사례에 빗대어 조선 왕조의 창업을 미화하고 있습니다. 조선 왕조가 천명을 받아 건국된 정당한 왕조임을 심적으론 여전히 고려사람이었던 백성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했습니다.


특히 용비어천가의 1장부터 8장은 조선 건국을 주나라 창업에 비유하여 서술하고 있어 비록 길더라도 전문을 살펴보면 좋을 듯합니다.


세종의 직계 6대 조상에 해당하는 해동 육룡 중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 태조(太祖)를 차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1장

해동에 육룡(여섯 영웅)이 나타나, 하시는 일마다 하늘의 복이시니,

(중원의) 옛 성스러운 군왕(古聖)에 견줄 수 있습니다.

2장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므로 꽃이 좋고 열매 많이 맺으며,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그치지 아니하므로 냇물을 이루어 바다에 이릅니다.

3장

주나라 태왕(즉 고공단보)께서 빈곡(豳谷)에 머무시며 제업(帝業)을 여신 것처럼,

우리 시조(즉 목조)께서 함경도 경흥(慶興)에 머무시며 왕업(王業)을 여셨습니다.

(* 목조: 세종의 6대조 이안사)


4장

(고공단보께서) 북쪽 오랑캐 가운데 사실 때 그들이 괴롭히므로 기산(岐山)으로 옮기셨는데 이것이 하늘의 뜻이었던 것처럼,

(익조께서) 야만인 가운데 사실 때, 그들이 괴롭히므로 함경도 덕원(德源)으로 옮기신 것도 하늘의 뜻입니다.

(* 익조: 세종대왕의 5대조 이행리)



5장

(고공단보께서 머무셨던) 칠저(漆沮)의 움막에 대해 성인 주공(後聖)께서 말씀하신 바 같이 천자의 대업이 쉽지 않음(帝業憂勤)이 그러한 것처럼,

(익조께서 머무셨던) 적도(赤島)의 움막에 대해 지금 살펴보니 왕의 대업(王業)의 어려움이 이러합니다.

(* 주공: 주나라 무왕의 동생)



6장

상나라의 덕(商德)이 쇠하여 (주나라가 곧) 천하를 맡게 될 마당에, 서수(西水) 인근이 시장통처럼 번화하였던 것처럼,

고려의 운(麗運)이 쇠하여 (조선이 곧) 나라를 맡게 될 마당에, 동해(東海) 인근이 시장통처럼 번화하였습니다.

(* 서수: 위수, 기수 등 풍읍 서편의 하천들,

동해: 동북면을 지칭)


7장

붉은 새가 글을 물고 와서 (문왕의) 침실 앞에 앉은 것은, 아들이신 무왕의 대업(聖子革命)에 하늘의 축복이 내리심을 뜻하는 것처럼,

뱀이 까치를 물어 (도조의) 큰 나뭇가지에 앉은 것은, 성손이신 태조의 대업(聖孫將興)에 상서로운 징조를 내리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 도조: 세종대왕의 4대조 이춘,

태조: 세종대왕의 조부 이성계)


8장

하늘이 태자를 택하셨고, 형의 뜻(양위)을 받아, 손자이신 무왕(聖孫)을 내신 것과 같이,

하늘이 세자를 택하셨고, (원나라) 황제의 뜻을 받아, 아들이신 태조(聖子)를 내셨습니다.

(* 태자: 고공단보의 삼남 계력, 문왕의 부친이자 무왕의 조부,

형: 고공단보의 장남 태백,

세자: 환조, 세종대왕의 증조부 이자춘)


그런데 태조 이성계는 물론 최연소 과거 급제자였던 태종 이방원도 유교적 이상향의 건설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방원은 누구보다도 유학에 정통한 군주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리학적 명분 보다는 현실을 중시하고 실리를 추구하는 성향의 통치자였습니다.


태종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정치를 강조했으나, 재상들은 태종의 그러한 정치 철학에 대해 우려를 표했습니다. 일례로, 태종이 한나라와 당나라를 높이 평가하자, 예조 참의 허조가 말하길 “전하는 반드시 삼대(三代, 이른바 하상주 삼대, 사실상 주나라를 지칭)를 본받으셔야 할 것이지, 한나라와 당나라는 본받으시면 안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1월 15일 경자 1번째기사)


그들은 부강한 나라 보다는 유교적 이상주의가 관철되는 나라를 우선시한 것입니다.


세종이 없었더라면 정도전이 꿈꾼 왕도정치의 이상은 크게 퇴색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에 대해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세종과 그의 손자인 성종 이후 현실보다 이상을 중시하는 정치문화가 주류로 자리 잡았고, 이후 이러한 현상은 구한말,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날의 대한민국까지 전해져 이어졌습니다. 이와 같은 이상주의적 정치철학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 모두가 가능할 것입니다. 장단이 모두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앞으로 대한민국의 집권세력이 진영을 막론하고 보다 실용주의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하길 부디 희망합니다. 이념과 가치에만 집착하기에는 우리 앞에 놓여진 현실이 녹록치 않기 때문입니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의 후과는 오백년, 천년을 가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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