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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 순례 ② – 바오지시의 중국청동기박물원

하존(何尊)의 택자중국(宅兹中或)과 국호의 기원

by 뜨끈한 콜라

바오지시 개관


바오지(宝鸡)시는 시안시 서쪽에 위치한 섬서성의 지급시(地级市)입니다. 2021년 기준으로 인구는 328만명이며, 면적은 18,117㎢으로 경상북도와 대략 비슷한 면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관중 지방의 일부이며 북위 33-35°, 전라남도 여수 정도의 위도에 위치하고, 위하(渭河)가 그 가운데를 관통하여, 시안과 유사한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친링산맥 북쪽에 있어 북방도시로 분류되며, 차쑤(茶酥), 치산면(岐山面) 등의 향토요리가 유명합니다.


섬서성의 어느 도시가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바오지 역시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입니다. 주(周)나라와 진(秦)나라가 몇 세대를 거쳐 서쪽 변방에서부터 서서히 동진하여 중원을 공략하고 천하를 차지하였던 관계로, 그들의 초기 근거지인 주원(周原)옹성(雍城) 바오지에 있었습니다.

2022. 7. 23.촬영. 천하를 도모하기 위해 진나라는 바오지에서 무려 400여년 동안 대업을 준비하였다.

주나라 문왕이 낚시하던 강태공을 등용했다는 조어대(钓鱼台), 후한시대 석가모니의 손가락 뼈를 보관하기 위해 건립되었다는 법문사, 촉한의 승상 제갈량이 북벌의 의지를 마지막으로 불살렀던 오장원 그리고 ‘염황의 후손’할 때의 염제의 능원도 바오지에 있습니다.


바오지 청동기박물원의 하존

무엇보다 바오지는 상주시대 청동기가 다수 출토된 중국 청동기의 고향입니다. 고로 바오지(宝鸡)에서 꼭 방문해야 할 장소 1순위는 중국청동기박물원입니다.


그리고 이 박물관에서 반드시 관람해야 할 유물은 단연 하존(何尊)입니다. 하존은 고대 제사에서 사용하던 청동 술잔입니다. 이름 자체는 ‘하(何)라는 인물이 소유했던 술잔(尊)’이라는 단순한 의미일 뿐이지만, 역사적 가치는 매우 큽니다.


2022. 7. 23.촬영. 하존

박물관에 사전 지식 없이 방문하게 되면 유물들이 모두 비슷하게 보이기 때문에, 대표적인 유물 몇 개라도 미리 공부하고 가시는 것이 좋습니다. 청동기박물원을 방문하신다면 적어도 하존 정도는 미리 알아두시되, 만약 당일 인상적인 유물 한두 개를 더 기억해 올 수 있다면 충분히 유의미한 관람이 될 것입니다. 전시된 모든 유물을 단번에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아쉬워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나중에 궁금한 점이 생기면 다시 방문하면 되니까요.


하존이 얼마나 중요한 유물인지는 매점에서 판매하는 아이스크림의 모양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의 박물관에서는 아이스크림을 판매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이스크림 디자인에 사용되는 유물이 그 박물관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그럼 청동기박물원 매점의 아이스크림은??? 당연히도 하존의 모양입니다. 가격이 그리 저렴하지는 않았지만, 이 유물을 오래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하나씩 사주었습니다.


2022. 7. 23.촬영. 하존 아이스크림

정부는 중요 문화재의 분실과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세 차례에 걸쳐 국외 반출 금지 문화재 목록을 발표했는데, 하존은 2002년 첫 번째 목록에 포함되어 앞으로도 해외 전시가 불가능합니다. 대신 중국 내에서 순회 전시를 하기 때문에, 청동기박물원을 방문하더라도 하존을 관람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불상사 없이 하존을 직관할 수 있었습니다. 하존을 관람하지 못하더라도 상주(商周)시대 청동기의 용도별·형태별 명칭 정도를 익힌다는 마음으로 가볍게 전시관을 둘러보는 것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택자중국(宅兹中或)- 여기 중국에 머무르다

그렇다면 하존은 어째서 그렇게까지 중요한 유물일까요? 그건 아마도 이 술잔 안에 새겨진 122자의 갑골문(금문) 때문일 것입니다. 그 중 특히 “택자중국(宅兹中國)” 네 글자가 핵심인데, 이를 직역하면 ‘여기 중국에 머무르다’입니다.


중국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1963년 바오지시 자춘진에서 발견된 하존은 지금으로부터 3,000여년 전 제작되어, ‘중국’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문화재 중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사실 이에 대해 책에서 처음 읽었을 때 저는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중국이라는 국가는 1912년에야 비로소 건국되었는데, 이렇게 오래된 유물에 새겨질 수 있는 단어인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존 갑골문 전문을 꼼꼼히 살펴보고 나서야 그 사정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해한 바의 대략적인 의미는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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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즉 成王)께서 홀로 성주(成周, 즉 낙읍)를 처음 쌓아 올리신 후 그곳에 머무시며, 무왕(武王)께 풍복의 제사를 올리셨습니다. 4월 병술일(丙戌日) 왕께서 우리 집안의 아이를 대전(京室)으로 불러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의 선조인 공씨(公氏 또는 부친이나 조부)는 고생을 마다하지 아니하고 문왕(文王)을 따랐다. 문왕께서 큰 운명(大命)을 받아들이셨고, 이후 무왕(武王)께서 홀로 큰 성읍 상(商)을 무너뜨리셨다. 무왕께서 예에 따라 단에 나와 하늘에 고하시기를

‘나는 이곳 중국에 머무르며(宅兹中或) 백성을 다스리겠습니다.’

하셨다.


오호라! 아이야, 지금의 너는 무지하다. 공씨를 본받아라. 그리고 하늘에 정성을 다해라. 내가 너에게 이렇게 명한다.”


왕(成王)께서 덕(德)으로써 하늘을 숭상하시니, 나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왕께서 하(何)에게 패(贝) 30붕(朋)을 내리시니, 술잔(尊)을 만들어 이를 기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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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7. 23.촬영. 서주시대 주나라 왕의 계보

이 글에 등장하는 성왕은 주나라를 세운 무왕의 아들입니다. 주나라 도읍인 풍읍(오늘날의 시안)은 서쪽으로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동쪽의 상나라 잔여 세력을 견제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왕은 동쪽의 낙읍(오늘날의 뤄양)에 주나라의 제2 근거지를 건설하고, 이후 그곳에서 부친인 무왕을 위해 제사를 지냈습니다. 성왕은 종친이었던 젊은이 하(何)를 불러, 주나라가 천명을 받아 상나라를 무너뜨렸던 과정을 알려주면서 그를 훈계하였고, 하는 성왕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기억하기 위해 이 청동 술잔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아이스크림 먹고 난 후의 스틱. 我有中国 何以为尊

‘나는 이곳 중국에 머무르며(宅兹中或) 백성을 다스릴 것입니다’라는 문장 중의 ‘중국’은 국호(國號)로 사용된 것이라기보다, 그보다는 중앙지방(中央之邦), 즉 도읍 또는 수도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무왕이 말한 택자중국은 결국 ‘나는 이곳(즉, 주나라 도읍인 풍)에 머무르며, 백성을 다스릴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무왕은 천하를 통치하는 권력이 이제는 상나라 도읍인 은(殷)이 아니라, 주나라의 도읍인 풍(豐)에서 나온다고 선언한 셈입니다.


방(邦)과 국(國)

민족, 세력 또는 나라를 뜻하는 글자는 애초 방(邦)국(或 또는 國)의 2가지가 있었습니다. 주나라 초기에 주로 사용되던 글자는 방(邦)이었으나, 두 글자가 점점 혼용되는가 싶더니, 한고조 유방(劉邦)이 황제가 된 이후 그나마 사용되던 방(邦)도 모두 국(國)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방(邦)자는 우방, 연방, 열방, 만방, 이방인 등 제한적인 쓰임새로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편, 주례(周禮)에 주석을 남겼던 학자들은 방(邦)과 국(國) 이 두 글자를 시간적 변천이라는 관점 보다는 상하 개념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즉 작은 성읍이 국(國)이라면 그 성읍들을 아우르는 큰 세력은 방(邦)이고, 제후의 나라가 국(國)이라면 천자의 나라는 방(邦)이라는 것입니다. 일리 있습니다.


방(邦)이라는 글자는 풍요로운(丰) 성읍(邑)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저는 이 글자가 주나라의 도읍지 풍읍(豐邑 또는 酆, 간체로 丰邑)을 의미하던 고유명사였다고 추정합니다. 말하자면 방(邦)은 오늘날의 시안시 풍하(沣河) 인근을 지칭하던 지명이지 않았을까.


주나라 무왕은 자신은 풍읍(丰邑) 및 그 인근만 직접 통치하고, 나머지 지역은 공신과 종친에게 나누어 주어 대신 다스리게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봉건제도(封建制度)였습니다. 오직 천자만이 방(邦)을 직접 다스릴 수 있다면, 제후들이 다스리는 영역은 무엇이라 불러야 하겠습니까.


或, 내 나라(ㅁ, 우리 조상의 신주단지)를 창(戈)으로 지킨다


예상하셨겠지만 정답은 바로 바로 국(或)입니다. 주나라 역대 조상들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을 의미하던 점차 제후국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이후 제후국들이 자신만의 정체성에 따라 서로 경계를 다투게 되면서, 성벽을 의미하는 큰 입구(囗)가 추가되어 國자로 정착된 것입니다.


한중일 삼국의 국호


이렇듯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호는 무려 3000년전 제작된 하존으로부터 그 기원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택자중국(이곳 중앙에서 천하를 통치하겠다)”이라는 표현은 아이러니하게도 상나라와 주나라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는 될 수 없었던 시대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패권을 차지한 성읍국가라도 당시의 농업기술과 생산력, 상업 발달, 인구 규모, 도로 및 교통 등의 한계로 인해 주변 지역을 직접 통치할 수 없었습니다. 단지 주변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무왕이 상나라를 정벌할 때 그를 따랐던 제후의 수가 800명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는 그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묘사하는 표현인 동시에, 천자라 할지라도 그의 권력이 제한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고조선의 시기에는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마치 그리스의 도시국가처럼 말입니다. (상나라, 주나라, 고조선: 그리스에 대응 / 은, 풍, 아사달 : 아테네에 대응)


‘중국’이 실제로 국호로 사용된 것은 쑨원의 1912년 중화민국부터였습니다. 즉 ‘중국’은 고작 100년 남짓한 역사를 가진 신생 국호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방(中邦)과 번방(番邦), 대국(大國)과 소국(小國)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구축된 주나라의 종법제도(宗法制度)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인들의 세계관을 형성하며 면면히 내려온 점을 고려할 때, ‘중국’이라는 국호의 연원이 서주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주장도 크게 무리는 아닌 듯합니다.


2023.4. 3. 택자중국. 눈썰미만 좋다면 시안시 곳곳 발견할수 있다.


한편 2000년 동안 일본의 국호는 일본, 오직 두 가지 뿐이었습니다. 앞서 다른 글에서 ‘일본’이 백제의 별칭일 수 있다는 점을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단정할 수는 없으나 660년의 백제 멸망이 일본으로의 국호 변경 과정에 모종의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없진 않습니다. 그러나 701년 다이호 율령에 따라 국호를 일본으로 변경했다는 것이 일본의 공식적인 입장이며 정설입니다. 어쨌든 701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1,300여 년 동안 동일한 국호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대단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조선, 부여, 고구려(또는 고려), 옥저, 동예, 삼한, 백제, 신라, 가야, 발해 등 다양한 국호를 사용하여 왔습니다. 그중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국호는 조선(북한), 삼한(남한), 고려(남북한 모두의 영문 국호 KOREA)로 총 3가지나 됩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상 최초 국가는 조선(朝鮮)입니다. 단군 할아버지가 세운 그 나라 말입니다. 조선이 요서-요동 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오랜 시간 존재했던 실체가 있는 나라임은 분명하나, 그 역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조선에 대해서는 추정 또는 상상에 의존하거나 주변국의 기록을 참고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아쉽지만 사료가 부족하니 어쩔 수 없습니다.


국호의 의미에 대해서도 워낙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데, 역시 ‘동쪽, 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를 의미한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설입니다(居東表日出之地故名朝鮮,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보낸 침략군에 의하여 도읍인 왕검성이 함락되어 조선은 그렇게 멸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은1500년 후 이성계의 역성혁명과 함께 다시 돌아왔습니다. 국호를 조선으로 하는 결정에는 아마 신진사대부들의 입김이 작용하였을 것입니다. 명태조 주원장도 이를 승인하면서, ‘동이의 국호로 조선(朝鮮)의 칭호가 가장 아름답고, 그 유래 또한 오래되었으니, 그 명칭을 근본삼아 하늘을 본받고 백성을 다스려 후사를 영원히 번성토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2월 15일 경인 1번째 기사).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하였다는 오랜 기록을 근거삼아 양측의 입장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셈입니다.


삼한(三韓)은 후에 백제, 신라, 가야로 발전하는 마한, 진한, 변한의 소국 연맹체에서 유래한 명칭입니다. 따라서 어원을 엄밀히 따지면 고구려는 삼한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후 우리 조상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지칭하거나, 한반도와 만주를 포함한 우리 민족의 강역 전체를 지칭하기 위하여, 이 ‘삼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왔습니다. 특히, 신라와 고려는 자신들이 삼한을 통일하였다는 자부심을 강하게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당나라 역시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하나의 권역으로 인식하여, 해동삼국, 삼번 또는 삼한(三韓)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구당서-동이열전-백제편 등 참조). "한"은 '크다, 위대하다, 넓다,'는 뜻으로, 징기스칸의 "칸"과 그 어원이 동일하다는 견해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민족을 지칭하기에 손색이 없는 이름인'삼한'은 고종황제의 대한제국과 상해임시정부의 대한민국을 거쳐 그렇게 오늘날의 우리 국호로 자리잡았습니다.


중원의 나라들은 전반적으로 우리 주로 동이 또는 고려(고구려) 등 민족으로 지칭하거나, 해동이나 요동과 같이 지역명으로 불러왔습니다. 주변국들이 발해왕을 고려국왕이라고 불렀던 것을 보아도 '고려'는 우리 민족을 폭넓게 지칭하는 명칭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고려'는 이란계, 아랍계 그리고 포르투갈 등 서양 상인들에 의하여 전 세계에 널리 되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통일한국의 명칭을 다시 정해야 할 때가 온다면, 물론 ‘조선’도 좋고 ‘삼한’도 좋지만, 저는 고려’가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연속성을 고려할 때 특히 그렇습니다. 나중에 다시 논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저는 ‘고구려’가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가장 핵심적인 연결고리라고 생각합니다.


결핍은 발전의 원동력

중국에 살다 보니 바오지의 청동기박물원이 아니더라도 상주시대 청동기를 접할 기회가 적지 않았습니다. 고대 중국의 청동기를 마주칠때면 언제나 절로 감탄이 나왔습니다. 그 옛날 구리와 주석, 납을 어떻게 대량으로 구할 수 있었을까 하는 놀라움과 함께, 복잡한 기물을 제련하여 주조하는 정교한 과정은 대체 어떻게 해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역사적, 예술적, 기술적 관점에서, 그들 청동기 문화의 위대함은 아무래도 부인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오히려 더욱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조상들의 청동기 문화는 초원으로부터 유래된 것으로서, 중원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른 기원과 발전 과정을 거쳤다는 점이었습니다. 중국 청동기의 장대함을 접할수록, 우리 청동기의 소중함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습니다.

2025. 5. 25. 길림성 박물관. 상단 좌부터 고조선, 부여, 부여, 고구려, 발해의 유물.


우리 고대 국가들은 유목민과 더불어 살아가던 농경,정착민의 나라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유목민과도 중원인들과도 구분되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조상들은 중원과는 구별되는 기원과 맥락에 따라 역사를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민족은 초원의 문화와 중원의 문화를 모두 흡수하여 자기화할 수 있는 축복받은 지정학을 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근대에 겪었던 어두운 불행들에 대한 기억 때문에 그동안 한반도 지정학에 대해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였던 것은 아닐까.

결핍과 필요가 더욱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 마련이 아니겠습니까? 추우면 추운대로, 평야가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식량이 없으면 없는대로, 이를 채우려는 노력을 더욱 치열하게 해야합니다. 극복하지 못하면 죽게 되니까요.


주몽이 고구려를 창건하면서 도읍으로 삼은 졸본은 험준한 산세에 둘러싸인 천연 요새였습니다. 방어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주변 강 유역을 따라 형성된 충적평야 덕분에 농업 생산력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기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좁은 분지라는 지리적 제약으로 인해 고구려는 졸본에만 안주할 수 없었고, 필연적으로 팽창을 통한 성장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확장 과정에서 고구려인들은 재갈만으로 말을 자유자재로 다루던 유목민들과 맞서야 했고, 그들에 비해 부족한 기마술을 보완하기 위해 등자개발해야만 했습니다.(고구려가 등자를 세계최초로 발명한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대규모로 정식 도입한 최초의 국가는 맞을 것입니다)


이른바 파르티안샷과 등자가 선명하게 그려진 수렵도. 국민학교때 수집하였던 그야말로 각별한 우표, 지금까지도 가장 아끼는 우표 중 하나이다.

결국 결핍이야말로 우리 민족 진취성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요? 영토도, 자원도, 인구도 모두 부족한 상황에서, 하루하루 살아남으려다 보니 오히려 놀라운 성취를 이루어낸 것은 아닐까요?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이 보여준 놀라운 경제 발전도, 심지어 BTS 같은 문화적 성과도 그런 결핍이 만들어 낸 값진 결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한민국을 극단의 위기로 내몰았던 계엄, 내란 사태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습니다. 위기에 더욱 강한 민족이니, 향후 우리 앞에 남겨진 과제도 잘 극복하리라 기대해봅니다. 특히 경제, 외교, 과학기술에서 더욱 성과가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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