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 또는 황제가 누구라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당태종 이세민이라 답할 것입니다. 그는 어느 방면 하나 부족함이 없는 훌륭한 정책을 폈고 또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공감하는 중국인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시안 사람들의 당태종에 대한 애정은 각별한 듯합니다. 매일 저녁 대당불야성 이세민 기마상 앞에서 펼쳐지는 정관의치 공연을 관람하면 그들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대당불야성 보행자 거리에서 이 공연을 먼저 보고 북광장으로 분수쇼를 보러 가면 시간이 얼추 맞을 것입니다
대안탑 북광장의 분수쇼 22.10.28.촬영
혹자는 청나라 4대 황제 강희제 애신각라 현엽을 천고일제(千古一帝)의 최고의 황제라고 평하기도 합니다. 이민족이라는 이유로 깎아내려지기도 하지만, 강희제가 현대 중국에 막대한 유산을 남긴 황제라는 점은 중국인이든 아니든 그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가상의 콘테스트를 연다면 당나라 태종과 청나라 강희제 이 두 사람이 마지막까지 남아 서로 자웅을 겨루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만큼 이 두 황제의 업적은 독보적이었습니다.
조선의 재상들은 진나라 시황제 영정, 수나라 양제 양광,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같이 업적은 뛰어나나 악명이 높은 황제들뿐만 아니라, 한나라 고조 유방, 무제 유철, 송나라 태조 조광윤, 명나라 영락제 주체, 청나라 강희제 애신각라 현엽과 같이 성군으로 명성이 자자한 황제들도 강하게 비판하곤 하였습니다. 비판의 요지는 유교적 관점에서 그들의 정치에 흠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완벽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의 유자들에게 완벽한 군왕은 누구였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아마 주나라 문왕 희창이 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유학의 주요 인물을 기독교 포교사의 관점에서 비유하자면, 주자가 사도 바울 같은 신앙의 전파자, 공자님이 예수님 같은 가르침의 원천, 고공 희단보가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선구자라면, 문왕 희창은 다윗왕과 같은 믿음의 본보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감히 누가 주나라 문왕에 도전할 수 있겠습니까? 언감생심, 어불성설입니다.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한번 잘못 걸리면, 중원의 어진 황제들도 가혹한 비판을 당하는 마당에 조선의 왕들은 얼마나 시달렸을까요. 그 매서움이 가히 짐작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 꼬장꼬장한 조선의 정승들도 당태종은 높게 평가하였다는 점입니다. 고구려를 무력 침공한 불구대천의 원수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백성을 위한 그의 정치가 유교 원리주의자들의 눈으로 보기에도 탁월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그들을 두려움에 벌벌 떨게 했던 태종 이방원이 떠올라 파블로프의 개처럼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던 것일까요? 부디 전자이길 바랍니다.
당나라 성공의 비결, 북조(이민족)의 전통과 유산
당나라가 이룩한 놀라운 발전과 번영은 당태종의 개인적 자질에 힘입은 바 큽니다. 그러나 그의 영웅적 비범함만으로 그 시대의 모든 성취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그건 아닐 것입니다. 당나라의 위업은 사마씨의 진나라가 몰락한 후 북방에 연달아 세워졌던 이민족 나라들의 진취적인 문화의 토대 위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당은 이른바 호한체제의 유산을 모두 물려받은 행운아라 할 수 있습니다.
한화정책을 폈던 선비족 북위 효문제의 낙양천도. 냑양박물관 2023.5.14. 촬영
특히 수나라가 대제국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피땀 흘려 일궈낸 모든 제도와 인프라를 그대로 취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당나라는 크게 번영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당나라는 수나라가 새로 창안한 3성 6부제,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던 과거제뿐만 아니라, 북위 등 북조의 여러 나라로부터 물려받아 공들여 보완한부병제, 균전제, 조용조 등 제도를 시행착오 없이 바로 시행할 수 있었고, 수나라가국력을 깎아 가며간신히 완공한 대운하와 거침없이 정비·확장한 장성 및 도로망 등 각종 인프라도 바로 접수하여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확대해보면 각 방마다 담장으로 둘러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당부용원 자운루(紫云楼). 2022. 5. 20. 촬영
섬서역사박물관에서 찍은 당나라 장안성 내의 사찰 배치도. 2022. 5. 26. 촬영
그 대단하다는 장안성도 당나라가 직접 설계·건설한 게 아니고, 수나라의 대흥성을 넘겨받아이름만 장안성으로 바꾸었을 뿐입니다. 수·당 시대 장안성의 배치도를 바라볼 때마다, 그리고 장안성 성벽이 있던 자리를 따라 걸을 때마다, 저는 수문제 양견의 대담한 배포에 깊은 인상을 받습니다. 기가 찹니다. 양견이 꿈꾸었던 대제국이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생각하면 할수록 궁금해집니다. 그 꿈이 실현되었다면 그 모습은 전성기의 당나라와 비슷한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심지어 당나라를 능가하는 것이었을까요?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고 합니다만, 만약 수나라가 그렇게 조급하지만 않았다면, 그랬더라면 역사의 주인공은 당나라가 아니라 수나라였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적어도 다음과 같이 말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이세민이 없었더라면 당나라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이세민이 있었어도 수나라가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그 당나라는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