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을 경계하며
직장을 다닌 후로는 출근, 야근, 휴식의 시간 조합만 바뀔 뿐 나의 일상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새롭게 만나게 되는 사람들도 새로 입사한 신입사원 또는 명함을 주고받는 거래처 사람들뿐이었다. 퇴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앞으로도 나의 인간관계는 이런 패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존에 살아오던 영역에서 벗어나 보니, 만나는 사람들도 모두 새롭다. 특히나 학교라는 테두리 안은 매일매일 새로운 친구를 자연스럽게 사귈 수 있는 환경이다. “친구를 얻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하나 얻는 것과 같다”는 명언처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만큼 전에 없던 경험들을 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깨닫는 것들 또한 적지 않았다.
- 그 나이에 맞는 고정된 진로는 없다
막 중국에 왔을 때, 새로 알게 된 한국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서로 나이를 묻게 되었고, 그는 스무 살이라고 했다.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아, 그럼 1학년인가 보네?”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가 “네? 아, 대학교요?”라고 말하는 그 짧은 순간 아차 싶었다. 스무 살이면 자연스레 대학교 1학년생이라고 연결 지은 나의 짧은 생각에 무안하고 미안해져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친구가 한국에서 대학교 2학년까지 마치고 어학연수를 온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검정고시로 남들보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대학에 진학했던 것이다. 이때 나는 또다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처음에 스무 살이면 학교를 다니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오만이었다. 내 짧은 생각을 반성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다음에는 스무 살의 진로를 대학을 다니는 사람과 다른 길을 찾은 사람, 둘로 나누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길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 나의 흑백적 사고방식에 다시 한번 놀랐다. 사실 사람들이 살아가는 형태는 아주 다양한데.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 내 나이를 말하면 직장인일 것이라고 으레 짐작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 수마다 다른 인생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 안에도 여러 길이 있던 것이다. 한국에서 회사를 다니던 내가 이제는 중국에 와서 자유롭게 공부하는 학생이 된 것처럼 말이다.
- 짐작으로 판단하지 말자
유학생들 중에는 다양한 국가에서 온 여러 인종의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겉으로만 보고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추측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나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더라도 누군가를 보았을 때 머릿속에서는 멋대로 짐작해본 적이 있다. 피부색만 보고 아프리카에서 왔을 것이라고 생각한 누군가는 미국인이었고, 동남아시아에서 왔을 것이라 짐작한 누군가는 프랑스인인 데다가 알고 보니 부모님이 중국인인 화교였다.
하루는 교실에 낯선 남학생이 들어와 앉아 있었다. 반 친구들은 중국 학생이 교실을 잘못 들어온 줄 알고 말을 걸었다. 그 친구가 “나는 미국인이야”라고 하자, 한 친구는 중국인이 장난을 치는 줄로 생각하고 그만, “하하, 그럼 난 중국인이야!”라며 농담으로 받아쳤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정말로 도중에 들어온 미국인 신입생이었다. 농담을 했던 친구는 자신이 한 말이 결례라는 것을 알고는 당황하며 사과했다.
한 러시아 친구는 아버지가 한국 분이셨고, 한국말도 할 줄 알았다. 유학생 사회에는 워낙 여러 언어를 쓰는 친구들이 섞여 지내다 보니 한국어를 못 알아듣겠거니 하고 바로 그 사람 앞에서 흉을 보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이 한국어를 못 알아들을 거라는 생각은 틀렸을 수도 있을뿐더러, 알아듣지 못한다 해도 바람직한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인 친구들과 밖에서 한국어로 이야기하면 중국인들이 우리가 알아듣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중국어로 우리 이야기를 하는 경우와 다르지 않다. 당하는 입장에서의 기분을 생각해본다면 모르는 사람과도 평화로운 기류를 유지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 그저 사람 사는 곳
기존에 비해 생각이 가장 많이 변한 부분은 중국인에 대한 편견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전에는 인터넷에서 도는 중국의 무서운 소문들을 보고 중국인에 대해 막연한 공포감이 있었다. 게다가 중국에 와서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못 알아듣는데 강한 억양으로 말하니 마치 완전 다른 세상의 사람들같이 느껴져 다가가기 두려웠다. 생각도 우리와는 많이 다를 것 같았고, 대화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었다. 하지만 언어가 통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우산을 챙기지 않은 어느 날,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어쩔 수 없이 손바닥만큼 머리 위를 막고 걸어가고 있었는데, 한 중국인 친구가 다가와 우산을 씌워주었다. 같은 방향으로 걸으며 몇 마디 주고받다가, 자신은 이쪽 건물에서 수업이 있다며 내게 기숙사까지 쓰고 가라며 우산을 빌려주었다. 나는 내 우산을 쓰고 다시 나와 그 친구의 수업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돌려주었다. 이 친구는 중국 유학을 온 후 처음으로 사귄 중국인 친구가 되었다.
도서관에서 와이파이 이용권 구입을 어떻게 하는지 헤매고 있을 때, 처음 보는 중국 친구가 자신도 잘 모르지만 연구해가며 충전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또, 길을 물을 때에도 사람들은 잘 알아듣지 못하는 내게 손짓으로 방향을 가리켜가며 또박또박 천천히 말해주었다. 이토록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중국인에 대한 내 생각이 바뀌었다.
이전에 내가 두려워했던 중국에서의 사건사고들은 비단 중국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일이었고, 중국은 인구가 많아 여러 가지 일이 발생할 가능성도 그만큼 많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저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을 가든 (어느 회사를 가든)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도 있는 것뿐, 중국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분만을 보고 쉽게 일반화하여 집단 전체에 적용한다면 편견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새로운 환경에서의 생활은 불과 몇 달 사이에 나의 편협했던 생각들을 바꾸어 주었다.
스스로가 생각의 테두리를 정해 놓는다면, 볼 수 있는 세계도 이만큼으로 한정되기 마련이다.
겪어본 것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본인의 자유이되, 겪어보지 않은 것에 대한 근거 없는 판단은 섣부른 편견이 된다. 편견 없이 어떤 것을 바라보는 것은 하루 이틀 만에 고치기 힘들 수 있지만, 나의 치우친 생각을 의심해보고 편견을 경계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은 지금부터 시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