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밍 Jun 27. 2019

배려 같은 소리 하네

사랑해서 그랬다  말하지 마세요.

난 어떻게 살라고!!!


그래, 도훈의 계획은 성공적이다.

수진이 평생을 가슴 아파하며 도훈 자신을 그리워하길 바랬다면, 완벽한 성공을 거뒀다.


알츠하이머임을 알게 된 도훈은 수진의 남은 삶이 자신으로 인해 힘들어질까 두려웠다고 했다.

그래서 그토록 아이를 원하던 수진 앞에서 정관수술을 했음을 통보했다. 그리고 마치 각본에 있었다는 듯이 얼굴에 제대로 물세례까지 맞아가며, 그렇게 모질게 정 떼기를 시작했다.

 

작정하고 수진을 밀어내기로 한 도훈에게 부부로서의 최소한의 예의는 필요치 않았다. 최대한 모질게 수진을 후벼 팠다. 그리곤 홀로 알츠하이머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눈물샘을 자극해야 할 법할 그 장면을 보다 한마디 했다.


"이기적인 놈"


친구며 친구 와이프까지 알게 된 일을, 살 비비며 살던 마누라만 모르게,
그렇게 어이없게...


도훈은 정말 수진을 생각했을까, 온갖 모진 말로 수진을 밀어내어 자신에 대한 미움만 가득한 상태로 다른 삶을 살도록 하는 게 정말 수진을 위한 일이라 생각했을까?


오히려, 살아가며 내내  본인을 곱씹어 기억하게 하려고 한 건 아니었을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결코 없다는데, 훗날 도훈의 처지를 알게 된 수진이 땅을 치며 후회하며 가슴 아파하길 바랬던 건 아닐까? 그렇게 미안한 마음으로 본인을 기억하게 하려 한건 아닐까?


그랬다면 성공한 듯싶다. 수진은 도훈을 미워했던 날들을 철저히 후회하며 가슴 아파했다. 식음을 전폐했고, 미안함과 가슴 아픔에 몸서리쳤다.



결혼생활에 슬슬 권태기가 밀려오고, 둘 사이 더 이상 달콤한 감정 놀이가 사 그러갈 때 즈음, 뭔가 태세 변환이 필요한 그때, 도훈은 그렇게 감정의 우위에 섰다. 본인이 계획한 대로.
꼭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었다고? 그랬다면 수진의 사랑을 되돌리기 위해 고뇌하던 그의 무의식이 의도한 대로, 그렇게 감정의 칼자루를 제대로 거머쥐었다. 그렇게 수진을 쥐고 흔들고 있다.





요즘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한다느니, 정통 멜로의 끝을 보여준다느니 하며 방영되고 있는 <바람이 분다>는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해지고, 짜증이 난다.

글세, 내가 달콤한 사랑에 울고 웃던 풋풋한 20대였다면 그 감상이 좀 달랐을까..

병을 숨기고 가슴 절절히 사랑한다는 아내를 저토록 모질게 쳐내는 게, 저런 방법을 통해 아내의 행복을 빌어주는 게 과연 사랑일까 생각하게 된다.


도훈의 아내 수진은 남편의 아픔을 몰랐다는 죄책감에, 또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채로 그를 증오했다는 죄책감에 하루하루가 괴롭다. 미안함에 몸서리치고 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말할 수 없는 "빡침" 올라오지 않을까? (다소 거칠어 쓸까 말까 몇 번을 고민했지만, 분노와 짜증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이 복잡다단한 감정을 표현하기엔,  미안하지만  단어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상대방을 배려한다는 핑계로 본인의 고통을 숨기고, 상대에게는 본인을 배려하고 나눌 기회를 전혀 주지 않는 것.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냄으로써 만회의 시간조차 주지 않는 것, 종국엔 상대방의 죄책감과 미안함을 유발하는 것. 생각해보면 상대를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만드는 아주 못된 기술이다. 건강한 결혼생활을 원하다면 결코 드러내지 말아야 할..


이런 상황을 만나면 미안하면서도 깊은 분노가 느껴지는 건 그래서가 아닐까 싶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힘든 일이 있으면 힘든 일이 있다고 그냥 말하면 안 돼?


결혼 해 살다 보면, 부부 사이에는 크고 작은 참 많은 일들이 생긴다.

내 입으로 말하자니 구차스럽고, 그렇다고 말을 안 하자니 억울하다. 말 안 해도 알아줬으면 하는데 말 안 하니 전혀 모른다. 상대 입장에서는 말을 그냥 하면 될 것을 인상만 쓰고 있는 그(그녀)가 이해가 안 된다 짜증이 난다.


오늘따라 심기가 불편한 남편, 분명 뭔 일이 있다. 집안을 감도는 싸늘함에 숨이 막혀올 때 즈음, 최대한 숨 고르기를 한 뒤 물었다.


"무슨 일 있어?"


굳은 표정으로 굳이 아무 일도 없다 한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데 말이다.

이런 경우, 알고 보면 항상 무슨 일이 있는데 말이다.  정말 무슨 일이 없는 것처럼 내 성질대로 다 했다가는 결국 미안할 일이 꼭 생긴다.  그런데 미안하기보단 마음속 깊이 짜증이 올라온다.

상대방이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그렇게 짜증이 나면서, 사실 우린 같은 상황에서 또 그렇게 입을 다문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날 배려해서 그러는 건가? 힘든 일 나눠봤자 함께 힘들어지니까?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배려하는 마음에서?

"아무 일 없어"라고 말할 거라면 정말 아무 일 없는 듯 행동해라. 그렇게 온통 티를 팍팍 낼 요량이라면, 차라리 말을 하던가. 죽을 때까지 모르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그냥 사실대로 털어놓으시지?


결혼 생활을 하면서 상대방을 진정 배려하고 사랑하는 방법이 뭔지를 항상 생각하게 된다.

혹여 정말 함께 힘들어할 배우자가 걱정되어, 그(그녀)를 배려하는 마음에 혼자 감당하고자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상황을 정확히 말하고 이해받는 것, 서로 조금씩 폐를 끼쳐가며 도움을 주고받는 것, 그러면서 상대방에게도 할 도리를 했다는 감정적 안정감을 주는 것은 건강한 부부관계에 있어 아주 중요하다.


한 번만 바꿔 생각해보면 금세 알 수 있는 일이다. 어려운 일이 있는 아내가 또는 남편이 나의 행복을 위해 비밀로 해주길 바라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지 혼자 정리하고 지 혼자 정을 떼고 있는 상대방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까?


"지금 뭐하는 짓이야?"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는 도훈, 그가 입을 다물고 있는 게 확실함을 느끼고 있는 수진, 무슨 일인지 말도 안 하는 상태에서 의논도 없이 정관수술을 하고 온 남편. 아이를 절실히 원하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남편의 이 행동에 수진은 말할 수 없는 "빡침"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그녀를 더 분노하게 한 것은, 분명 무슨 중대한 일이 남편에게 벌어지고 있음이 확실한데도 침묵하고 있는 도훈의 행동이 아니었을까?  


<바람이 분다>


도훈은 친구 항서를 찾아갔다.

"수진이가 힘들어지는 걸 볼 수 없어"

이 사람아, 그 말을 수진에게 해야지!

정말 수진을 생각했다면, 도훈은 병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함께 했어야 했다. 그렇게 수진 스스로, 원하던 아이를 낳을 것인지, 아님 말 것인지 결정할 수 있게 해 줬어야 했다. 도훈 자신은 어차피 모든 걸 잊어갈 것이라면, 남아있는 수진이 도훈을 충분히 사랑하게, 그리고 이별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렇게 여한이 남지 않도록 배려했어야 했다.  


떠나보내든지 말든지, 떠나가든, 남아있든 수진과 함께 해야 했다. 적어도 도훈이 사랑해서 그랬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사랑하기에...?"


그런 소리 말아라, 정말 아내를 사랑했다면, 그래서 그녀를 떠나보내려 한 것이라면 , 그렇게 다 쏟아낼 기회를 줬어야 한다 . 미안하지만 도훈은 그렇게 여한 없이 정리할 수진이 오히려 두려웠던 거다.  그래서 선수를 친 거다.


"이기적인 놈"


혼자 투덜대던 나를 지긋이 보던 남편이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난 치매 진단받는 즉시 울며불며 당신한테 전화할 테니까..^^"



이전 05화 여보, 나 잠시만 동굴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