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비 Jul 31. 2023

안소영, 『시인 동주』

저항의 방법


광장을 한 바퀴 흐뭇하게 돌아 나오던 동주의 눈살이 갑자기 찌푸려졌다. 인력거 정거장에 가려 언뜻 눈에 띄지 않았는데, 역 건물 옆에 일본 경찰 주재소가 있었던 것이다. 하늘을 찌르듯 높다란 깃대 위에 일장기가 펄럭이며, 역 광장과 광장에 모여든 조선 사람들을 거만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동주는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잔잔하게 약동 치던 심장이 일시에 베이는 듯했다. 저 일장기의 붉고 둥근 원, 히노마루는 저들의 단심이 아니라, 저들에게 상처 입은 자의 핏빛 흔적인지도 몰랐다. - p.11


말의 씨, 곧 낱말은 사람 마음의 움직임과 상태를 알 수 있는 기본 단위라 했다. 독립된 작은 단위의 낱말에서 비롯되어 생각의 체계가 서고, 깊은 사색으로 이어지며, 사람 사이의 관계로 드러나기도 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게다가 홀소리, 닿소리, 겹소리, 된소리, 숨떤소리, 숨안떤소리... 소리를 표현하는 말들은 어찌 그리 어여쁜지. ‘말할 이’와 ‘말 들을 이’에 따라 갈래지어 나가는 말들의 체계는 또 어찌 그리 섬세한지. - p.21


광화문통 비각 앞에서 내린 일행은 보기 싫은 총독부를 등지고 태평통으로 향했다. 스러져 간 왕조에 절개가 그다지 남아 있지 않은 청년들이건만, 왕궁을 가로막고 둔중하게 서 있는 조선 총독부 건물은 볼 때마다 숨이 막혔다. 광화문통에는 광화문도 없었다. 총독부를 짓느라 경복궁 동쪽으로 쫓겨 간 뒤로 지붕 한끝만 아스라이 보일 따름이었다. - p.39


세상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휘몰아쳐 돌아가고 있었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버린 지도 30년, 무장한 일본 군대는 날마다 조선을 거쳐 만주로 나아갔다. 익환의 말을 듣자니 그 이상도 꿈꾸고 있나 보았다. 식민지 조선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인들조차 전쟁 준비에 생활을 위협받고 있었다. 이러한 때 일개 젊은이가, 더구나 식민의 땅에서 태어나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처지로 앞날을 그려 보고 계획해 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무사히 공부를 마치고 세상에 나아가, 가족을 거느리고 살아갈 꿈을 꾸어도 되는 걸까. 어느 순간 자신들의 삶이 거대한 삽으로 송두리째 떠져, 다른 곳으로 휙 던져지거나 파묻히는 것은 아닐까. 불현 듯 떠오르는 불길함에 다들 몸서리쳤다. 서쪽으로 가는 해가 길게 비끼며 나무 아래로 들어와 젊은이들의 가슴을 도려내듯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 pp.73~74


“공부? 그래, 책장이나 뒤적뒤적하는 게 공부인 줄 아나? 전차 칸에서 내다보는 광경, 정거장에서 사람들과 부딪치며 느끼는 감정, 기차 속에서 보고 듣는 모든 이야기가 바로 생활이요, 진정한 공부라네! 책장만 뒤지며 인생이 어떠하니 사회가 어떠하니 떠들어 봐야 고리타분한 소리일 뿐, 과연 무엇을 똑바로 알겠는가? 문안으로 나오게!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생한 모습을 보며 제대로 된 공부를 하게.” - p.93


동냥을 하는 거지를 보며 작가는 호주머니를 뒤진다. 그날따라 지갑도, 시계도 없고 손수건마저 없다. 당황한 그는 거지의 손을 덥석 움켜잡고 이야기한다. “용서하시오, 형제. 아무것도 가진 게 없구려.” 거지는 파리한 얼굴에 웃음을 띠고 말한다. “괜찮습니다, 형제여. 그것도 적선입니다.” 노작가 투르게네프는 깨닫는다. 자신도 그에게 적선을 받았음을. - p.113


동주는 결심했다. 잘못된 전쟁을 지지하고 동포들의 고달픈 삶을 외면하는 것이 문학의 길이라면, 가지 않으리라. 감투와 명성을 탐하고 궤변으로 자신의 행동을 미화하는 자들이 문인이라면, 되지 않으리라. 하나의 시어를 찾기 위해 수없이 버리고 취하는 연마의 과정이 저렇게 쓰이는 것이라면, 더 이상 쓰지 않으리라. - p.124


소학교, 아니 올해부터 이름이 바뀐 ‘초등학교’ 학생이었다. 사람은 자유롭고 독립된 개인이기 이전에 국가의 통제와 지시를 따라야 하는 ‘국민’이라는 것을. 어릴 때부터 주입하려고 바꿔 놓은 이름이었다. - p.159


“아니, 조선 아이들이 일본 천황 이름을 줄줄 외워 대는데, 그것 보고만 있어야 한단 말이오? 어린 동생 앞에서 그따위 소리를 읊어 대다니, 이 녀석들도 오기만 해 봐라.”

“글쎄, 아이들을 나무랄 일이 아니라니까요. 나라와 세상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어른들이 문제지.”

“...”

김송 씨는 애꿎은 담배만 뻑뻑 피웠다. - p.175


연전에 있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말과 글이 다르고 지내는 곳이 달라도,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다는 점이다. 자신이 놓인 시대와 사회의 제약 속에서도, 사람들은 삶이 던져 주는 질문을 붙들고 열심히 해답을 찾으며 살아간다. 어떻게 살 것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더불어 행복한 삶을 어떻게 누릴 것인가... 자신의 삶에서 다 풀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혹은 다음 세대에게 넘겨준다. 이 세상에 사유하는 인간이 스러지지 않고 남아 있는 한, 그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시대를 이어 가며, 좀 더 많은 사람들을 거쳐 가며, 더욱 깊어지고 풍부해질 것이다. 남의 것을 빼앗고, 남의 나라도 빼앗고,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고 모욕하는, 심지어 다른 사람의 자유와 생명마저 빼앗아 버리는 야만의 시대라 해도... - p.245


정우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런 류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았다. 지금 동주나 몽규만 든는 소리가 아니었다. 부당하게 권력을 쥔 자들이 이에 맞서려는 사람들을 억누르며 내던지는, 역사적으로도 오래된 조롱이었다. 누르면 누르는 대로 엎드려 있지 않고 일어나 저항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고 맞서 싸우다 쓰러져 간 사람들에게 던지는 조롱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계속될지 모를 조롱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조롱이 더 질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의에 맞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생명력이 더 끈질길지 끝까지 두고 보아야 하리라고 정우는 이를 악물었다. - p.262


시인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슬픔과 절망에 잠긴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며, 다른 사람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는 잔혹한 말들도 여전합니다. - p.306

매거진의 이전글 오현철, <시민불복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