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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비 Aug 01. 2023

고병권, 『철학자와 하녀』

함께 있어줌의 철학


가난한 사람과 철학자는 서로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 사이에는 화해하기 쉽지 않은 적대감이 있다. 가난한 사람에게 철학은 먹고살 만한 이들이 벌이는 고상한 유희이고, 철학자가 볼 때 가난한 사람은 눈앞의 이익에 매여 살기에 철학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혀를 차거나 최소한 무심하다. - p.5 line 13~18


밤하늘의 별이 그녀에게 준 것은 천체에 관한 지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일깨움, 각성, 용기였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야말로 철학에 대한 참 좋은 정의라고 생각한다. 철학은 특정 분야의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단 하나의 지식이나 정보도 달리 보게 만드는 일깨움이라는 것 말이다. 나는 철학이 ‘박식함’에 있지 않고 ‘일깨움’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삶에서 불가능과 무능력, 궁핍과 빈곤을 양산하고 규정하는 모든 조건에 맞서 분투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철학은 다르게 느끼는 것이고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며 결국 다르게 사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가난한 이들이 껴안을 수 있는 철학이며, 가난한 이들이 철학자에게 선사하는 철학에 대한 좋은 정의라고 생각한다. - p.9 line 9~19


며칠 후 한 스님을 뵐 기회가 있어 꿈 이야기를 했다. “저는 관음보살이 부러워 죽겠는데 지장보살께 잡혀서 한 대 맞았습니다.” 그랬더니 스님이 빙긋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관음보살은 오늘날로 따지면 재벌 회장 같은 분입니다. 정말로 가진 게 많지요. 그것을 모두 나눠줍니다. 그 이름만 부르면 누구에게나 줍니다. 그런데 지장보살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줄 게 없지요. 그런데 지장보살은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 곁에 있어 줍니다.”

그때는 ‘그렇구나’ 하는 정도였는데, 오늘은 문득 ‘있어준다’는 그 말이 한없이 큰 선물처럼 다가온다. 지장보살. 그는 부처 없는 시대에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한다는 보살로, 모두가 성불할 때까지, 다시 말해 지옥이 텅텅 빌 때까지 자신은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묘한 역설이다. 서원대로라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늦게 성불할 존재이다. 하지만 그런 서원을 세운 걸 보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빨리 성불할 존재임이 틀림없다. 어떻든 지옥에 단 한 사람도 남겨두지 않고 성불할 때까지 곁에 있겠다는 그 무지막지한 서원 때문에 ‘업보가 정해져 있다’거나 ‘해탈 불가능한 존재가 있다’거나 하는 말들은 모두 힘을 잃어버렸다. 그가 있으면 ‘업보’도 ‘불가능’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끝까지 ‘네 곁에 있겠다’는 말은 그처럼 위대하다.

‘있어줌.’ 이 말에서는 ‘있음’과 ‘줌’, 다시 말해 ‘존재’와 ‘선물’이 일치한다. 독일어에서는 ‘무엇이 있다’는 말을 ‘Es gibt ~’라고 한다. 여기서 ‘gibt’라는 동사는 ‘주다’는 뜻의 ‘geben’에서 온 말이다. 그러니 ‘있음’이 곧 ‘줌’이다. 존재가 선물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존재’가 ‘선물’이라는 말을 고상한 미사여구 정도로 받아들이지 말기를 부탁드린다. 힘들고 힘든 시절, 바로 지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젠 지쳤다’며 운명의 줄을 놓아버리고 있다. 신문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뭔가 줄 수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을까? 그래서 떠올린 말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우리가 가진 원초적 선물이 필요하다. 곁에 있어주자. 나를 너에게 선물하자. - p.24 line 3 ~ p.25 line 10


공부하는 이들은 시끄러운 곳을 피해 조용한 곳을 찾지만, 아마도 우리가 공부하는 목적은 시끄러운 곳에서 고요를 얻는 것에 있을 것이다. 세상과 거리 두기를 할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거리 두기를 해야 하며, 세상에서 벗어날 것이 아니라 세상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공부일 것이다. 대혜스님이 “방석에 앉아 공부하는 것보다 천만억 배의 뛰어난 힘”이라고 부른 것이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공부를 하라.” 선사의 말이 내 정신의 등짝을 내려친다. - p.41 line 14~21


나는 ‘수유 너머’의 ‘힘’이 아니라 ‘약함’에 대한 답을 준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약함’이라는 것도 그야말로 공동체 일반론을 피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다. 일을 해본 사람들은 공감할 터이지만, ‘되는 이유’ 한 가지를 아는 것은 ‘안 되는 이유’ 백 가지를 아는 것보다 중요하다. 물론 ‘안 되는 이유’도 참고는 해야겠지만, 실행을 가능케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것이 ‘되는 이유’이다. 요컨대 우리는 ‘힘’을 봐야 한다. - p.50 line 13~20


내가 가진 것이 자갈과 나뭇가지뿐이어서 아직 공부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공부를 늦추는 핑계일 수는 있어도 공부에 대한 참다운 인식은 아니다. 공부는 언제든 할 수 있고, 당연한 말이지만, 바로 시작함으로써만 시작되는 것이다. 공부란 자신이 가진 미약한 것에서 시작해서 계속해서 앎을 생산하고 더 나아가는 것이지, 어떤 방법을 알아내서 단번에 도달하게 되는 게 아니다. 진리에 이르는 방법은 따로 없고 진리가 가는 길이 진리의 방법이다. 그리고 공부란 그 길을 스스로 내면서 나아가는 일이다. - p.64 line 5~13


아마도 자코토 역시 세상에 ‘바보들’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가 내린 ‘바보’의 규정은 남들과 다르다. 바보는 능력이 없는 자가 아니다. 바보는 다만 ‘욕구가 멈추어버린 자들’, ‘의지가 꺾인 자들’이다. 의지가 꺾인 곳에서 지능은 발휘되지 않는다. 불평등의 현실을 본래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일 때, 또 현실 사회에서 우월한 자들이 실제로 자신보다 우월한 자들이라고 생각해버릴 때, 우리는 정말 ‘바보’가 되고 만다. 그러니까 ‘바보’는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겸손한 사람이 아니라, 현실적 차별을 그대로 인정하고 심리적으로 수긍하기 위해 자기 능력을 부인하고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이다. - p.69 line 6~15


칸트가 계몽의 비밀을 ‘지능’이 아니라 ‘용기’에서 찾았던 이유와 같다. 그가 떠올린 계몽된 사람이란 박식한 사람이 아니라 용감한 사람이었다. ‘감히’ 따져 묻고 ‘감히’ 알려고 하는 의지와 용기를 가진 사람 말이다. 그래서 그는 ‘감히 알려고 하라’를 계몽의 구호로 삼았다. 말하자면 계몽은 지식 이전에 정서에서 일어난 변화인 셈이다. - p.80 line 17 ~ p.81 line 1


“내 작업의 동기는 아주 간단했다... 그토록 끈질기게 작업에 몰두했던 나의 수고는 단지 호기심, 그렇다, 일종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그런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허용해주는 그런 호기심 말이다. 지식의 습득만을 보장해주고 인식 주체로 하여금 길을 잃고 방황하도록 도와주지 않는 그런 지식욕이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우리 인생에는 ‘성찰과 관찰을 계속하기 위해서 자기가 현재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으며, 자기가 지금 보고 있는 것과 다르게 지각할 수도 있다’는 의문이 반드시 필요한 순간이 있다... 그렇다면 철학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걸 정당화시키는 게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어디까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가를 알아내려는 노력, 바로 그것이 아닐까.” - p.132 line 21 ~ p.133 line 12


저항을 긍정하고 저항을 통해 드러난 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저항을 부인하고 그것을 없애려는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정신분석은 우리에게 ‘저항의 부인’이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그 통로의 봉쇄라는 것을 말해주며, 강한 억압은 더 큰 왜곡을 낳을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이것이 정신분석가와 피분석자, 의사와 환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항 없는 세상’을 꿈꾸고 ‘독백’만을 일삼는 사람들이 무엇을 놓치며, 스스로 어떤 한계에 갇히는지, 그래서 어떤 위험에 빠지게 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시끄럽다고 귀를 닫으면, 당연한 말이지만, 이해할 수도 없게 된다. 저항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편하고 좋겠지만, 그것은 무지의 위험 속에서 누리는 안락이다. 그리고 그 위험은 누구보다도 그 안락을 누리는 자를 향하게 되어 있다. 한마디로 저항을 소중히 생각하고, 저항의 언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 p.155 line 12 ~ p.156 line 3


내가 역사적 사실로서 고흐의 죽음에 숨은 진실을 밝혀낼 증거를 가진 건 아니다. 하지만 해석적 사실로서 고흐의 죽음은 내게 하나의 명징함으로 다가온다. 광기로 불리든, 그 무엇으로 불리든, 소수성에는 죽음이 들어 있지 않다. 소수자들의 고통은 신체적‧정신적 병약함보다는 그것들의 강력한 반란에서 온 것이 많으며, 설령 제 손으로 생명을 끊어야 할 때조차 그것은 외적 힘에 대한 굴복이고 패배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주 발작을 일으켰고, ‘따라서’ 죽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종종 소수자의 ‘발작’에 대한 사회의 ‘살해 위협’일 수 있다. 고흐의 발작과 죽음 사이에서 내가 떠올린 것은 그것이다. - p.177 line 6~16


어떻게 이런 ‘절대 권력’ 내지 ‘순수 군림’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그것은 권력자에게 일어난 일보다는 수용자, 즉 피해자에게 일어난 일과 관련이 있다. 시설에 수용될 때 수용자들은 사실상 모든 사회성, 다시 말해 모든 사회적 관계와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다. 그들은 단번에 연고 없는 자, 권리 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인간을 사회적 존재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인간을 인간이게 해주는 모든 맥락이 제거된 채 거기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그 순간에 그들은 생존을 시설에 전면적으로 의탁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단순 생명체로 축소된다. 삶의 이러한 전면적 의존이 그것을 의탁 받은 체제의 절대 권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수용자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시설과 시설장은 모든 것을 할 수가 있다. 한마디로 이곳은 권력의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 p.187 line 5~16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서도 샌델은 한국 진보주의자들이 좋아할 만한 말을 했다. 그는 일본군의 ‘성 노예’ 문제를 직접 거론하면서 사과할 줄 모르는 일본 정부를 질타한다. 그뿐만 아니라 과거 세대의 일은 그에 관여하지 않은 현세대가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은, ‘내 책임은 내가 떠맡은 일에 한정한다’는 자유주의의 도덕적 사고라고 비판한다. 샌델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독립적인 개인의 판단이나 합의로 환원할 수 없는 도덕적 의무가 있다. 우리는 항상 어디엔가 소속되어 있고, 거기서 나오는 다양한 빛, 유산, 기대와 의무를 물려받는다. 그는 매킨타이어의 입을 빌려, “내 삶의 이야기는 내 정체성이 형성된 공동체의 이야기에 속한다”고 말한다. 공동체주의자들의 입장에 따르면 ‘나’는 항상 공동체에 속해 있고 그 유산과 기대를 함께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사를 무시할 수 없고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 p.232 line 13 ~ p.233 line 5


아무리 대단한 권위를 가진 사람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그 말이 아무리 올바른 것일지라도 환자가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런 효과도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치료의 관건은 환자가 현재의 증상을 유발한 과거의 사건으로 돌아가는 것에 있으며, 거기서 그 사건을 과거와는 다르게 체험해야 한다. 즉 과거를 반복하지만 다르게 반복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치료만이 아니라 ‘깨우침’ 일반이 그렇다. 과거에 내가 저지른 일을 그대로 떠올리지만, 그것을 달리 느끼고 달리 대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뭔가를 깨우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옳은 말은 그저 옳은 말일 뿐이다. 그것이 내 것이 되려면 내 안에서 다시 체험되어야 한다. 내가 내 식으로 체험하지 않는 말이란 한낱 떠다니는 정보에 불과하다. 세상에는 여전히 옳은 말들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세상에 옳은 말들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이 정처 없이 여기저기 흘러다니고 있을 뿐이다. - p.251 line 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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