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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비 Aug 14. 2023

김소연, 『한 글자 사전』

아름다운 한글


격 -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를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격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모든 걸 가진 자에게서보다 거의 가진 게 없는 자에게서 더 잘 목격할 수 있는 가치이고, 모든 걸 가진 자가 이미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유일한 가치이고, 거의 가진 게 없는 자가 유일하게 잃기 싫은 마지막 가치이기 때문이다. - p.28 line 1~6


결 - 우리의 손이 닿거나 우리의 몸을 감싸거나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모든 것의 감촉이다. 부드러운 결은 안식을 주고 세월의 결은 경외감을 유발하며, 섬세한 결은 우리의 감각을 깨우고 복잡한 결은 우리의 시선을 다르게 만들어준다. - p.29 line 1~4


나 - 가장 쉬운 연산으로 헤아려지는 자. 그렇지만 가장 어려운 연산으로 헤아려야 할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자. 나를 가장 많이 속이는 장본인. 내가 가장 자주 속는 장본인. 가장 추악하지만 가장 빠르게 용사하는 사람. 빠른 용서로 가장 깊이 추악해지게 방치하게 되는 사람. 가장 만만한 분노의 대상. 가장 최후의 분노의 대상. 실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라서 두려운 자. 어쩌면 ‘너’의 총합일 뿐인 자. - p.67 line 1~7


농 - 허구는 사실을 압도하고 농담은 진실을 제압한다. - p.82 line 1


뒤 - 성공을 추구하는 자들은 이것이 대부분 구리며 성공을 추구하지 않은 자들은 이것이 대부분 아름답다. - p.108 line 1~2


떼 - 동물들 사이에서는 이 대열에서 떨어져나오는 것이 낙오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대열에서 떨어져나오는 것이 용기다. - p.117 line 1~2


법 -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창안하였으나 권력을 비호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 p.171 line 1~2


붓 - 칼과 활과 총은 위기가 아닌 순간에 내려놓고 붓은 위기의 순간에 꺾는다지만, 붓도 칼과 활과 총과 같이 싸우기 위하여 손에 들게 된다. 싸움의 방식이 다를 뿐이다. - p.190 line 1~3


삯 - 값과 비슷하지만 쓰임이 다르다. ‘버스삯’은 버스를 타는 데 드는 비용이고, ‘버스값’은 버스를 사는 데 드는 비용이다. 사람은 그러므로 값으로 매길 수 없고 삯으로는 매길 수 있다. - p.205 line 1~3


이렇게 살아온 우리 시대의 어른, 우리들은 이제 아무도 지성인이 아니다. 대학에 있다고 해도, 대단한 학문을 하는 학자라 할지라도, 어떤 분야가 됐든 실은 모두 마찬가지다. 저서가 많고 논문이 많아도 마찬가지다. 모든 자본에 대하여 초연한 듯한 미소를 머금으며 새로운 세대 앞에서 자기 계발에 대하여 강연하는 얼굴들도 지성인이 아니다. 우리는 지성인보다는 모리배에 가깝다. 대규모든 소규모든 뚜렷하든 느슨하든, 우리는 우리가 속한 준거집단에 손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준거집단 안에서 잘잘못을 끄집어내어 바른말을 해서도 안 된다. 이런저런 사안들에 대한 비밀들을 누설해서도 안 된다. 내부고발자는 우리가 배워온 윤리관으로는 반윤리적이다. 그리하여 말을 아낀다. 신중한 침묵이 최선이 된다.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목소리들이 추궁을 해와도 모르쇠로 일관한다. 상부 명령에 의하여 움직여야 한다. 명령의 도덕성에 대해서는 숙고하지 않아야 한다. 내가 의리로 가담한 일들이 비리가 되어 폭로되더라도, 세월이 약임을 믿고 입을 다물어야 한다. 금세 망각될 것이고 금세 잠잠해질 것을 믿는 것이 곧 연륜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무엇보다, 그 어떤 과오에도 반성하지 않아야 한다. 사과하지 않아야 한다. 반성과 사과는 약자의 몫이고, 권위를 상실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어서는 안 된다. - p.214 line 7 ~ p.215 line 7


악 - 바야흐로 진화를 거듭하여 악을 가시적인 폭력을 휘두르지 않게 되었다. 특정한 집단과 특정한 인물에게, 특수한 상황과 특수한 입장에게 귀속되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 악은 모두에게 알맞게 배분되어 있다. 모두가 나눠 가졌기 때문에 좀처럼 악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믿음직한 친구의 얼굴을 바라볼 때도 우리가 불신 한 줌과 불안감 한 줌을 손에 꼭 쥐고 있는 것은 친구의 얼굴이 어째서가 아니다. 선이 언젠간 악을 이긴다는 믿음을 점점 상실하고 있는 것도 내 얼굴 깊은 곳에 악의 그림자가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스스로의 악과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한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자기 멱살을 잡는다. 멱살을 잡히는 나와 멱살을 잡는 나의 조용한 악다구니, 하루를 하는 것 없이 지낸 날에도 이유 없이 피곤이 몰려온다. - p.251 line 1~13


옆 -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 사회적으로 높거나 낮거나의 문제가 아니라 인맥상에서 멀거나 가깝거나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누군가에게. - p.270 line 1~3


욱 - 삼킨 것들이 역류할 때 나는 소리. 욱하는 건 순간이지만 욱해서 쏟아진 것들의 냄새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 p.281 line 1~2


죄 - 죄인은 아니지만 우리는 죄악에 가담하는 중이다. 한 사회의 악순환에 대하여 말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을 함으로써 무감하지 않으며 묵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 할 뿐,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 말로써 우리를 죄악과 구별 지어 스스로가 안전하다는 자기 위안을 얻는 동시에, 죄악을 더 당당하게 더 안전하게 만드는 데 공조한다. - p.308 line 1~6


 참 - 참은 분열적이며, 부분적이며, 논리정연하지 않은 논리에 의해서만 겨우 증명된다. 참이 거짓보다 더 믿기지 않는 맥락을 지녔다. - p.321 line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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