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생명의 서열주의는 현대 문명이 만든 악덕이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는’ 비뚤어진 풍조도 그렇거니와, 사람이 모든 생명을 오로지 제 뜻대로 할 수 있다고 맹신하는 폭력성도 문명이 만들어낸 생명 서열주의의 악습이다. 똑같은 정원수, 똑같은 애완동물이라고 하더라도 그 교환가치에 따라 무심코 대접을 달리하고 마는 습성은 개발 이후에 생긴 것이다. 미물에게조차 나누어 먹이려고 ‘고시레’하던 풍습이 언제부터 사라졌는지 뒤돌아보면 자명해진다. 티베트에선 술 한 잔을 마실 때조차 세 번씩 술을 튕겨서 자연 속의 온갖 생명에게 나누어 주는 풍습이 아직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들은 모든 생명 가치가 똑같다고 여기고 생활 속에서 그걸 실천하면서 산다. 우리보다 훨씬 가난하면서도 우리보다 훨씬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 사람들이 다 그러하다. - p.21 line 18 ~ p.22 line 7
‘공부’하는 일이 나쁜 것은 물론 아니지만 ‘노동’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어른들이 오히려 빼앗는 교육 환경이란 ‘사람다운 사람’을 기르자는 것이 아니다. ‘공부’만 해서 그가 어떻게 인생의 큰 위기를 헤쳐갈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린이나 젊은이에게 가르쳐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은 ‘노동의 즐거움’과 ‘사랑의 환희’일 것이다. 구태여 노동보다 더 재미있는 게 인생에 있다면 나는 ‘사랑’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노동의 경험은 참된 휴식과 아울러 인간다운 사랑에 대한 학습 효과를 저절로 불러온다. 우리 교육의 근본적인 걸림돌은 꼭 가르치고 경험하게 해야 할 이 두 가지 덕목을 위한 프로그램이 너무 없다는 것이다. - p.25 line 7~15
인간은 피부 색깔로 줄 세워질 수 없고, 문화엔 서열이 없다는 게 세계화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상식이다. 그러나 개발 이데올로기가 만든 경제제일주의는 모든 것을 서열화하는 강력한 습관을 만들어 우리에게 주입시켰다. 제3세계 사람들에게 유난히 야박하게 구는 심리의 밑바닥엔 분명히 모든 생명 값이나 문화 값조차 재빨리 수직으로 서열화하고 마는 천박한 후천적 습관이 작용하고 있다. 가난했던 시절의 콤플렉스, 혹은 가진 자의 우쭐함에 계속 사로잡혀 산다면 선진화는 요원한 일이 될 게 뻔하다. - p.77 line 7~13
사람에겐 눈이 두 개 있다.
좌우에 눈이 있는 것은 넓게 보자는 것보다 오히려 똑바로 보자는 뜻에 더 부합된다. 한쪽 눈만 가지고선 아무래도 사물의 균형을 맞추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개의 눈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보는 것은 우리가 흔히 사실이라고 믿는 현상에 불과하다. 객관적 현상을 똑바로 보자는 사실주의적 세계관이 바로 이 두개의 눈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현상은 곧 진실인가.
사실주의적 세계관의 문제는 진실이 항상 사실이나 현상과 완전히 부합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고약하게도 사람은 보는 대로만 알고 보는 대로만 느끼고 보는 대로만 삶을 운영하지 않는다. 사람은 두 개의 눈으로 현상을 보지만 보이지 않는 ‘제3의 눈’으로 현상 너머의 다른 본질을 또 본다. 그것이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이다. 거창하게 본성을 꿰뚫은 영혼의 눈이라고까지 갖다 붙일 것도 없다. 문화적 인간과 야만적 인간을 가르는 분기점이 되는 ‘제3의 눈’이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기억의 눈과 상상력의 눈을 말하는 것이다. - p.265 line 2~16
그러나, 여전히 자유의 문제가 남는다.
전시대에 나는 정치적인 억압 때문에 부자유했지만 동시에 내 창자벽에 똬리를 틀고 있던 ‘빈 젖’의 기억 때문에도 부자유했다. 이제 ‘빈 젖’의 상처가 나를 억압하도록 내버려두진 않겠다. 그런 것에 사로잡혀 있는 한 새로운 시대가 불러오는 조작된 욕망의 노예로 영원히 부자유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욕망의 감옥에서 해방되려면 먼저 상처의 감옥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그게 행복하고 충만한 자유로운 삶으로 가는 길이다.
여윈 자유인이 살찐 노예보다 낫다. - p.271 line 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