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힘
앞에 글에서 언급된 선비가 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지식인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이들은 세상의 온갖 일에 참견하고 개입하려고 한다. 하늘에서 땅속까지, 사람에서 미물까지, 눈에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말하지 않는 것이 없다. 물론 세상을 변화시키고 움직이려는 그들의 이상을 탓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문제는 현실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가에 있다. 시골 사람이 마주한 선비는 자신의 말조차 실현할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 p.29 line 8~15
‘수여睡餘’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졸고 있는 사이에 마음 놓고 휘갈긴 글들이다. 각성된 정신세계가 이성적으로 제어되고 있다면, ‘졸고 있는 사이’는 자유로운 영혼이 넘나드는 공간이다. - p.71 line 10~14
만약 책 읽기를 좋아한다면 도리어 이상한 일에 속하지요. 게다가 아이들이 책 읽기를 그만두고 놀기만 하는 일을 가지고 곧장 그의 평생을 이러니저러니 말하는 것은 큰 잘못이에요. - p.83 line 3~6
본래 병이란 망령됨과 망령되지 않음 사이에서 일어난다. ‘망령’은 생각과 현실이 상식에 어긋나고 되지도 않는 욕심을 갖는 것을 말한다. 사실 공부를 하는 것은 이런 병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나아가 밝은 지혜의 눈과 귀를 얻고 세상의 온갖 교설과 망언을 구별할 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 p.93 line 1~6
누구에게나 허물은 있다. 제 허물을 감추려 남의 허물을 부풀리기도 하고, 제 허물 탓에 남의 허물을 눈감아주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이가 들수록 남의 허물은 물론 그 사람 자체를 이해하는 폭이 좁아지고 각박해진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만큼 자기의 생각을 고집하는 경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 p.111 line 13~18
간절히 원하지만 다정한 벗을 오래 머물게 할 수 없는 마음은 꽃가루를 묻힌 나비를 맞는 꽃과 같다. 나비가 오면 너무 늦게 온 듯 여기지만 잠시 머무르면 소홀히 대하고, 그러다 날아가 버리면 다시 나비를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 p.114 line 1~4
그러면서 세상의 질서와 권력에 의해 소외된 이들을 위해서는 자그마한 이야기 한 톨까지 남기고자 했다. 그들의 삶이 지닌 진정함과 아름다움이 사라질까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 p.136 line 1~4
현재의 기록은 후대에 기억으로 불렸다가 결국 절제와 규범을 위한 전범으로 되살아난다. 역사를 짓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지난 일을 기억해내어 낱낱이 더듬고, 그것을 까밝히는 것만으로도 혹자는 자랑차고, 혹자는 수치에 뭄 둘 곳을 모를 정도다. 이를 통해 사람들의 생각과 말과 행위는 자극을 받고 새로워진다. 이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역사를 믿는가 믿지 않는가, 의식하는가 그렇지 않는가는 앞날의 명암을 판별하는 관건이 된다. - p.172 line 8~15
전통이 이념이 되고 우상으로 되면, 역사적 발전에 따라 필연적으로 낳았던 자신의 역사적·문화적 계승자에게 도리어 금치산을 선고하고 목 졸라 죽일 정도의 잔인함을 갖고서 폭군 같은 행위를 아무 거리낌 없이 하게 된다. 또한 모든 발전의 현재 및 장래를 막기 위하여 과거, 현재 및 다른 곳에 매몰되어 있던 찌꺼기를 한없이 모두 불러들여 동원한 뒤 복고주의 무대 위에 훌륭한 허깨비로 등장시킨다. 이것이 우상이 된 전통의 극단적 모습이다. (생략) 전통의 우상화는 결국 역사적 권위를 이용하여 발전과 새로움을 억제하는 데 있다. (생략) 이는 전통의 개악이며, 지배체계의 임무이기도 하다. - 최악한, 『동아일보』 수록 - p.197 line 3~12
일찍이 우리 조상들도 국가의 자존과 독립이 힘겨워질 때 역사에서 배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개인적인 감정이나 집단의 이익을 앞세우기 이전에 무엇으로 모두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공정하고 냉정하게 올바른 길로 나아가려 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의 결단과 실천은 훌륭한 역사로 남아 우리를 이끌고 있다. - p.198 line 14 ~ p.199 line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