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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비 Sep 30. 2023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우리의 역사

모든 역사는 ‘주관적 기록’이다. 역사는 과거를 ‘실제 그러했던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방송뉴스와 신문보도가 현재를 ‘실제 그러한 그대로’ 전해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컨대 『조선일보』와 『한겨례』가 보여주는 2014년의 대한민국은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신문을 만드는 사람들이 나라 안팎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 가운데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만 선택해서 보도하며서로 다른 목적과 시각을 가지고 그 사실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어떤 설명할 수 없는 이유에서 인류가 멸망하고 기록이 모두 사라졌다고 하자. 그리고 오직 극소수의 한국인과 『조선일보』 또는 『한겨례』의 기록만 요행히 살아남았다고 하자.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생존자들이 그 기록을 토대로 과거를 복원한다면어느 신문이 남았는지에 따라 그들이 기록하는 역사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 p.8 line 7 ~ p.9 line 4     


내가 한국현대사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오로지 빛나는 승리와 영광의 기록이어서가 아니다그런 역사는 어디에도 없다개인이든 국가든모든 역사에는 명암이 있다우리의 현대사도 빛과 어둠이 뒤섞여 있다. 그 역사를 정직하게 대면하려면 당위로 현실을 재단하려는 집착을 버려야 한다. - p.12 line 11~15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걸출한 개인을 흠모하는 성향이 있다. 스스로 계획을 세워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좋아한다남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도남에게 무언가를 시키는 것도 왠지 편하지 않다. 돈이나 권력보다는 지성과 지식을 가진 이를 우러러보며 내가 남을 부당하게 해치지 않는 한, 사회든 국가든 그 누구든 내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 p.18 line 5~10     


다수결로 권력자를 뽑는 민주주의 선거제도는 더 훌륭한 사람의 당선을 보장하는 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 p.21 line 6~8     


현실의 인간은 이성과 더불어 감정을 지닌 동물이다감정적 호불호가 때로는 이성적 판단과 합리적 손익 계산을 압도한다. - p.22 line 3~4     


빛과 어둠이 공존하지 않는 역사는 없다. 인간 자체가 둘 모두를 가진 존재일진대 역사가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드높이 들어야 할 빛이 있고 그 빛으로 인해 차츰 사라져갈 어둠이 있기에, 민족의 역사도 우리들의 인생도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 p.28 line 14~18 

    

토지와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을 실시하는 사회주의는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을 처음부터 내포하고 있었다. - p.40 line 24 ~ p.41 line 1     


나는 대한민국현대사를 만든 힘이 욕망이었다고 생각한다. 욕망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느낌 때문인지 사람들은 욕구라는 말을 선호한다. 하지만 뭐라 부르든 상관없다. ‘대한민국의 기적’을 만든 힘은 국민이 개별적 집단적으로 분출한 욕망이었다. 사람은 충족되지 않은 욕망을 안고 산다만약 모든 욕망을 다 채워서 어떤 결핍도 느끼지 않는다면 더는 행동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은 새로운 욕망을 끝없이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 p.52 line 10~18     


내세우는 이념이 무엇이든 국민이민중이인민이또는 대중이 그 나라의 국민임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국가의 결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복종할 때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무질서에 대항해 공동체를 지키려고 헌신하려는 태도를 보일 때그 국가는 정통성 있는 국가가 되며 자연스럽게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다. - p.75 line 20 ~ p.76 line 1     


민족사적 정통성도 없고, 경제적 효율성도 없으며, 민주적 정당성 마저 없는 정부가 들어선 나라는 정통성 있는 국가일 수 없다. 결국 국민들이 저항권을 행사하기로 결심했다. 역사적 대의명분과 경제적 효율성은 당장 어찌지 못한다 할지라도 최소한 민주적 정당성이라도 가진 정부를 원했기 때문이다그것이 4.19혁명이었다. - p.84 line 2~6     


4.19는 미완의 혁명이었다. 부정선거 규탄으로 시작해 민중의 힘으로 독재자를 축출하고 새 정부를 세웠다는 점에서는 분명 성공한 정치혁명이었지만 그 혁명을 완성할 능력과 의지를 가진 주체가 없었기에 혁명의 정치적 결과는 기존 정치세력 민주당의 집권으로 귀착되었다. - p.88 line 18~22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세요.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도 생명을 바치더라도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니,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겨레의앞날과민족의해방을위해기뻐해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했습니다. –한성여중 2학년 진영숙 양이 남긴 편지 p.89 line 15 ~ p.90 line 3     


혁명인지 쿠데타인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쿠데타는 혁명과 달리 민중의 동의와 지지와 참여가 없이 폭력으로 국가질서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행위다. - p.94 line 7~9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좋아하는 시민들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대상은 사실 그의 인격과 행위가 아니라 그 시대를 통과하면서 시민들 자신이 쏟았던 열정과 이루었던 성취자기 자신의 인생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 p.99 line 20~23     


우리는 각자 나름의 철학과 인생관을 지니고 산다똑같은 경험을 해도 철학이 다르면 해석이 달라지며경험까지 다르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 p.105 line 8~10     


나는 여기에서 그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은 사람들과 죽어간 사람들이 느꼈을 기쁨과 슬픔자부심과 분노역사가 그들의 인생에 각인한 성공과 좌절의 흔적을 본다. 대통령들이 품었던 야심과 포부를 읽는다. 독일 루르지역 탄광의 지하갱도와 리비아의 사막에서 석탄 검댕과 흙먼지를 먹으면서 일했던, 기계에 손가락과 팔다리를 잘리고 목숨을 잃었던, 중금속에 중독되고 갖가지 직업병에 시달렸던 노동자들의 고통과 희망을 느낄 수 있다. 스마트폰, 주상복합 아파트, 풀 옵션 승용차, 벽걸이 텔레비전, KTX 열차, 국적항공기, 문무대왕함, 인천국제공항의 해외여행자 행렬, 다도해 국립공원의 쾌속선, 오늘 우리가 누리는 어느 것 하나도 하늘에서 거저 떨어지지 않았다. 청년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원래 거기 있던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한국 경제의 50년 궤적을 몸으로 밀어왔던 사람들은 이런 것을 보면서 꿈을 꾸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 p.118 line 22 ~ p.119 line 10     


만약 재벌체제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면 문어발 경영의 바람직하지 못한 부작용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재벌이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자들의 사업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규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막강한 시장지배력을 악용해 소비자와 협력업체를 착취하는 행태를 막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매우 어렵다. 국가가 재벌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재벌이 국가를 관리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 p.146 line 19 ~ p.147 line 1     


우리에게 재벌은 애증의 대상이다. 재벌이 없는 일상은 생각하기 어렵다. 국민들은 재벌기업이 지은 아파트에 살면서 재벌기업이 만든 텔레비전, 냉장고, 에어컨을 쓰고 재벌기업이 만든 승용차를 탄다. 재벌기업이 만든 옷을 입고 재벌기업이 생산한 스마트폰을 쓰며 재벌기업이 운영하는 프로야구와 프로축구 경기를 본다. 재벌기업이 만든 화장품을 바르고 재벌 계열의 백화점과 대형 마트에서 쇼핑을 하며 재벌기업이 공급하는 생명보험에 가입한다. 청년들은 지불능력이 탄탄하고 근로조건이 좋은 재벌기업에 취직하기를 원한다. 자식이 재벌회사에 취직하면 부모는 고시합격이라도 한 것처럼 기뻐한다. 재벌은 우리의 일상생활을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으며어쩌면 우리의 미래마저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재벌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헌법 위에 군림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국가권력을 통한 정치적 민주적 개입과 통제뿐이다나는 이것이 경제민주화의 핵심이라고 본다. - p.150 line 17 ~ p.151 line 6     


한국 경제의 기체결함은 ‘죽기에는 너무 큰’ 재벌이 국민경제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삼성, 현대, LG, 대우, SK 같은 대형 재벌그룹이 망하면 수많은 협력업체와 자금을 대출한 금융기관이 망하고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는 실업자가 된다. 재벌 총수들이 회사를 잘못 운영해 망할 위기에 빠져도 국민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정부가 회사를 살려주어야 한다. 재벌 입장에서는 위험한 투자를 해서 돈을 벌면 자기 것이 되고 방만한 경영을 해서 문제가 생기면 국가와 국민에게 짐을 떠넘길 수 있다이런 식으로 이익을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하는 행동을 경제학 전문용어로 도덕적 해이라고 한다재벌 대기업은 보험료 한 푼 내지 않으면서도 국가를 파산에 대비한 최후의 보험자로 써먹은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국가안전망’이 있기 때문에 재벌들은 두려움 없이 위험하고 방만한 차입경영을 할 수 있었다. - p.157 line 7~19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피가 강물처럼 흐른 폭동, 반란, 혁명과 반혁명, 내전과 전쟁을 겪었다. 그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거저 얻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었다. 하나는 대한민국을 떠나 더 자유롭고 풍요로운 나라로 가서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찾는 길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 길을 갔다.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을 그런 나라로 바꾸는 길이었다더 많은 사람이 그 길을 선택했다나도 거기 있었다. - p.173 line 18 ~ p.174 line 2     


어느 쪽이 먼저일까민주주의를 이루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번영한 것일까아니면 경제가 발전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일까어느 것도 먼저가 아니다이 둘은 선순환 관계에 있다. 어느 특정한 시점에는 경제발전과 민주주의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경제적 번영과 민주주의는 어디에서나 함께 진전되었다. 무엇이 이런 선순환 관계를 만드는 것일까? 원하는 삶을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욕망이다. 그렇게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유가 있어야 한다. 자유를 누리려면 물질의 결핍이 주는 억압을 극복해야 하고, 부당한 제도와 낡은 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개인의 기중심적 선택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강제를 철폐해야 효과적으로 경제적 번영을 이룰 수 있다고 한 애덤 스미스의 견해가 특수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만 타당하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이미 입증되었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스미스가 틀리지 않았다. 개인의 자유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사회는 경제적 번영을 길게 유지하지 못한다. - p.175 line 11 ~ p.176 line 5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들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였다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대의를 알리고 대중의 관심과 각성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테러와 암살이 아니라 분신과 투신을 선택한 투쟁방식은 세계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 p.180 line 10~13     


모든 권력은 집중과 확대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진보든 보수든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감시와 견제가 느슨해지면 누구나 권력을 오남용하려는 유혹에 빠진다이럴 때 시민들이 참여하고 비판하고 저항하지 않으면 민주주의 제도는 껍데기로 전락하고 만다. - p.189 line 18~21   

  

지구에게 인간은 암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암 환자가 죽으면 암세포도 죽는다. 그런데도 암세포는 인체의 생사를 고려하지 않고 끝없이 자기를 증식한다. 호모 사피엔스의 행동은 암세포의 행동과 똑같아 보인다. - p.288 line 13~16     


난민촌 거주민은 남을 배려하기 어렵다. 병영국가의 국민들 역시 주어진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당시에는 마음이 있는 사람도 자기 처지가 어렵고 사회 분위기가 경직되어 있었던 탓에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살았다.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광장에 들어선 후에야 사람들은 비로소 주변을 살피고 타인을 배려하기 시작했다그에 따라 국가의 기능도 점차 바뀌었다국민을 감시하고 명령하고 처벌하는 일뿐만 아니라 시민을 보호하고 돕는 일에도 힘을 쏟기 시작한 것이다대한민국은 복지국가를 향해 조금씩 전진했다. - p.341 line 1~8     


나는 연민보다 분노를 느꼈다우리의 도덕적 직관은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일지라도 사람을 그런 식으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 p.360 line 15~17     


나는 본문에서 우리 국민들의 국가에 대한 요구가 복지국가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겨가는 중이라고 주장했다. 복지국가는 시민들을 사회적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국가다. 대한민국은 기업을 지원하는 일에 정부 재정지출의 20퍼센트를 쓰고 있다. 북한과 우리 국민을 통제 단속하는 일에 또 그만큼의 국가재정을 쓴다. 그것이 서해훼리호의 참극을 이미 겪고서도 세월호의 비극을 막지 못한 중요한 원인이었다. 그 돈의 일부라도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일에 투입한다면, 세월호의 아이들은 구하지 못했지만 앞으로 또 다른 비극이 벌어지는 것은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413 line 21 ~ p.414 line 5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다. 미래는 우리들 각자의 머리와 가슴에 이미 들어와 있다. 지금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이 시각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시간의 물결을 타고 나와 대한민국의 미래가 된다. 역사는 역사 밖에 존재하는 어떤 법칙이나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욕망과 의지다. 더 좋은 미래를 원한다면 매 순간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 좋은 것을 쌓아야 한다. 우리 안에 만들어야 할 좋은 것의 목록에는 역사에 대한 공명도 들어 있다. 우리가 만든 대한민국현대사의 갈피마다 누군가의 땀과 눈물, 야망과 좌절, 희망과 성공, 번민과 헌신, 어리석은 악행과 억울한 죽음이 묻어 있다. 그 55년의 이야기를 마치면서, 나는 그 모든 것에 공명하고 싶어하는 동시대의 벗들에게 말하고 싶다. 벗이여, 미래는 우리 안에 이미 와 있습니다! - p.417 line 17 ~ p.418 line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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