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속의 고요
소설 목록: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 『아무것도 아닌 것』, 『우리 안의 천사』, 『영영』, 『여름』, 『밤의 대관람차』, 『서랍 속의 집』, 『안나』
일어나지 않은 일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나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말은 뱉는 순간 허공에 흩어진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가장 깊은 안쪽에 가만히 모아두고 싶다. 그것이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지라도.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 - p.9 line 1~5
그 말은, 잘못될 가능성이 50퍼센트라는 거잖아요?
동물병원 대기실에는 이런 나의 반박에 대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남우의 귀에는 이미 내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이 공간에서 가장 절박한 사람은 나라는 것을 알았다. 살리려는 의논은 크게 말할 수 있어도, 죽이려는 의논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안의 천사』 - p.73 line 9~14
그땐 영원히 지속될 줄 알았어, 행복이, 우린 참 사랑했거든. 젊은 시절의 부모가 얼마나 뜨겁게 사랑했는지, 무엇에 이끌려 국적과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결합하게 되었는지 미안하지만 나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과거의 정열과 무관하게 현재 그들의 삶은 몇 모금 마신 다음 뚜껑을 열어놓고 방치한 페트병 속 탄산수 같았다. 『영영 여름』 - p.106 line 14~19
마지막 직장을 그만둔 뒤 아무런 통보 없이 문간방에 틀어박힌 남편을 생각하면 미리 알려준 딸이 고맙기도 했다. 양의 남편은 재취업도, 창업도, 출가도, 자살도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사회적인 이슈에 관심을 보인 적도, 처지를 비관하는 언행을 보인 적도 없었다. 그는 그저, 종일 끼고 뒹굴 수 있는 컴퓨터 한 대와 아내가 채워둔 냉장고 속 먹을거리만 있으면 만족하는 듯했다. 안분지족의 교훈을 몸소 실천하는 삶이라 할 수 있었다. 진즉 이혼을 단행했다면 인생이 달라졌을까. 그랬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을 부양하고 있을 것이고, 연말정산이 조금 불리하다는 것 말고는 등에 얹힌 짐이 한결 가벼웠을 것이다. 하는 수 없었다. 결정의 순간에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방식으로 결정해버리고, 전 생애에 걸쳐 그 결정을 지키며 사는 일이 자신이 자초한 삶의 방식이라고 양은 탄식했다. 『밤의 대관람차』 - p.138 line 14 ~ p.139 line 9
양은 음악 선생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일처리를 그렇게 하시면 안 되죠. 뜻밖의 반응에 음악 선생이 눈을 껌뻑였다. 정해진 원칙이라는 게 있잖아요? 쉽게 어기기 시작하면 정신없이 무너질 수 있어요, 다음에는 꼭 미리 상의해주세요. 『밤의 대관람차』 - p.146 line 13~17
양은 그들의 사랑이 불투명한 도기 주전자에 담긴 뜨거운 청주 같은 것이었다고 의심해야 했다. 한 잔씩 따라 달게 홀짝이다 보면 이윽고 비어버리는 것, 퍼내어도,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술병은 없었다. 『밤의 대관람차』 - p.151 line 13~17
제발,이라는 부사가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다. 아주 작은 것에 흔들리는 것이 사람이니까. 『안나』 - p.202 line 14~15
사람에게는 사람이 필요하다. 원망하기 위해서, 욕망하기 위해서, 털어놓기 위해서. 『안나』 - p.215 line 22 ~ p.216 line 1
가장 쉽게, 빨리 여행을 떠나는 방법은? 옆에 있는 소설책을 집어 들고 펼치는 거다. 밥을 먹다, 청소를 하다, 출퇴근길에도, 잠자리에 들어서도, 언제 어디서나 바로 지금 내가 놓여있는 이곳의 풍경을 지우고 다른 시공간으로 들어가는 길, 얼핏 보면 여느 날의 평온한 풍경이지만 골치 아프고 속 시끄러운 사정들이 와글거리는 여기를 잠시 잊고 다른 시계가 걸린 동네를 헤매다 낯선 이의 뒷모습을 따라가보는 길, 그런 길들이 소설 속에 나 있다고 믿는 편이다. - p.228 line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