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경이
포켓몬스터 게임 초기작인 ‘금·은 버전’에서는 ‘은빛산’이라는 배경이 등장한다.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인 후지산(富士山)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왜 은빛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직접 후지산을 보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지난 연휴 동안 여행을 가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 이름이 붙은 까닭이 궁금했었으리라.
긴 연휴 동안 가족들과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목적지는 도쿄였다. 일본에는 몇 번 다녀온 적이 있었으나 도쿄는 처음이었기에 긴장과 설렘이 공존한 채 비행기에 올라탔다. 길지 않은 시간 끝에 나리타 국제공항에 발을 내디뎠다.
우여곡절 끝에 숙소에 도착하고, 체크인 후 시부야로 향했다. 그 유명한 ‘시부야 스크램블 스퀘어’와 ‘시부야 스카이트리’를 보기 위해서였다. 시부야에 발을 내딛자 북적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특히 교차로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혼잡한 그들 속으로 들어가서 나 역시 인파 속 하나가 되었다. 솔직한 감상으로는, 그곳은 특별하지 않은 교차로였다. 무엇이든 브랜드 마케팅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반면, 시부야 스카이트리에서 보이는 전경은 장관이었다. 낮의 도시도, 해 질 무렵의 붉은 노을도, 밤이 되어 총총 빛나는 야경도 인상적이었다. 각자의 삶을 사는 이들이 모여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을 이루고 있구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에는 폭풍우가 몰아쳐서 제대로 된 관광을 즐기지는 못했다. 그래도 료칸으로 가는 길목에 본 고즈넉한 산 중 하코네마치 일본 마을 풍경은 제대로였다. 잔잔한 배경 음악이 흐르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속에 들어온 느낌이라고 할까. 그날은 그 길 끝에 도착한 료칸에서 휴식을 취했다. 제공되는 저녁 식사를 한 뒤 온천에서 몸을 씻었다. 노천탕에 앉아 어스름 보이는 달을 찾으려 고개를 들었다. 온천수는 내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고 불어오는 밤바람은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언젠가 미래에 이날을 회상한다면 이 순간이 가장 인상 깊게 남으리라고 예상한 나는 또 한 번 다짐했다. 글을 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리라. 반드시 작가가 되리라. 고된 순간이 찾아올 때, 오늘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힘을 내리라,라고.
전날 폭풍우 덕인지, 여행 사흘째는 날씨가 화창했다. 맑게 갠 하늘 아래에 아시노코호수 쪽으로 향했다. 로프웨이, 그러니까 케이블카를 타러 이동하는 중에 문뜩 무언가가 내 눈에 걸렸다. 후지산이었다. 감탄만 나왔다.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아서 산봉우리 끝, 만년설이 쌓인 아주 일부만 보였는데도 신비로웠다. 그 감정은 후지산에 대한 기대를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기대와 함께 로프웨이에 올라탔다. 천천히 올라가며 후지산과 아시노코호수가 보였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자 전경이 펼쳐졌는데, 그것을 내려다본다면 벅차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시부야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것과는 또 다른 공간감, 또 다른 두근거림이었다. 이후 아시노코호수의 해적선도 타고, 삼나무 숲길도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후지산과의 인연은 끝나지 않았다. 드라이브 코스인 하코네 스카이라인을 따라 가와구치코의 로손 편의점에 도착해 인증샷을 찍고, 후지산 배경의 시모요시다 거리도 걸었다. 그날 하루 몇 가지 서로 다른 장소에서 후지산을 보았지만, 감상은 일관적이었다. ‘환상적이다. 신비롭다. 동시에 고즈넉하다.’ 그러니까, 현실적인 감각이 떨어지는, 초현실적인 배경이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비현실적이라거나 인공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자연의 경이, 그 투박하고 추상적인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내가 아쉽지만, 그것이 후지산을 표현하는 가장 합당한 표현인 것 같다.
다음 날, 그러니까 여행의 마지막 날은 아키하바라를 방문해 돈키호테나 빅 카메라 등 면세점에서 쇼핑도 즐겼으나 여전히 전날의 후지산이 선명하게 아른거렸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도 사진을 보며 또 한 번 감탄할 정도였으니.
3박 4일이라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여행이었으나 후지산을 본 것만으로도 새로운 신비를 체험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왜 일본이라는 나라가 후지산을 그토록 자랑거리로 내세우는지, 왜 일본의 상징이 그 산이 되었는지 단번에 수긍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포켓몬스터에서 은빛산이라는 이름으로 그 산을 담아낸 것처럼, 나 역시 언젠가 내 작품 속에서도 후지산의 신비와 경이를 담아 내보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들었던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