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은 좋지만 내 삶이 사라질까 봐 불안해
인터넷 세계를 돌아다니다 보면 흥미로운 짤을 많이 보게 된다. 그중 하나가 '입금 전, 입금 후'라고 불리는 짤이다. '입금 전'이라는 글자 아래에는 배우들이 휴식기에 찍은 조금은 살도 붙고 수염도 기른 일상 사진이 보이고, 그 옆으로 '입금 후'라는 글자 아래에는 헤메코(헤어, 메이크업, 코디)를 완벽하게 갖추고 찍은 근사한 프로필 사진이 나타난다. 작품이 시작되면 일상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지는 배우들의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붙은 '입금 전, 입금 후'라는 타이틀이 의미심장하다. 때로 수십 킬로그램의 몸무게를 찌우고 빼는 배우들의 독한 노력에는 개인의 타고난 의지력만이 아닌 분명 돈이 가진 강제력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 같은 평범한 회사원이 경험하는 월급의 힘도 엄청나다. 대학생 때는 오전 수업도 신청하지 않던 내가 새벽 6시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방학 한번 없는 회사를 무려 초등학교보다 오래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다 월급의 힘이다. 막상 비싼 등록금을 내며 공부하던 대학생 때는 종종 수업을 빼먹기도 했지만 그건 내가 돈을 받고 일하는 회사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다음 달에 갚아야 하는 카드값과 대출이자는 나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성실한 인간으로 만들어주었다. 언젠가 한 번은 헬스장 1년 이용권을 끊고도 몇 번 나가지 않아서 아까운 돈을 모두 날린 적이 있었다. 그때 친구와 이런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다. 돈을 내고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회사에서 돈을 받고 운동을 했다면 나도 완전 핫바디가 되었을 텐데,라고 말이다.
실제로 돈을 받는 것은 프로와 아마추어를 나누는 기준이기도 하다. 프로는 자신이 하는 일로 돈을 받고 그래서 상대가 돈을 지불할 정도의 준수한 실력을 갖추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돈을 받은 만큼 상대가 만족할만한 품질의 결과를 내야 한다. 그렇게 돈이 오고 가는 순간 타인의 기준은 일을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가늠자가 된다. 또한 프로는 어떻게든 돈을 받고 맡은 일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는 정말로 일을 하기 싫은 순간에도 억지로 일을 계속해야 하는 상황도 마주치게 된다. 반면 아마추어(Amateur)는 프로의 경우와 완전히 반대다. 보통 애호가로 번역되는 이 말은 사랑한다는 뜻의 라틴어 아마토르(Amator)에서 왔다고 한다. 무언가를 좋아해서 거기에 나의 시간과 돈과 애정을 쏟는 사람을 뜻한다. 이렇게 내가 좋아서 내 돈을 쓰며 하는 일은 오직 내 기준만을 고려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아마추어의 실력은 천양지차이며 스스로가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언제든 마음이 식는 순간이 오면 자유롭게 일을 그만둘 수 있다.
돈이 가진 강제력은 때로 나를 성장시키는 힘이 되어준다. 돈의 힘은 종종 마치 마법의 약물처럼 혼자의 의지로는 하지 못했던 일을 해낼 수 있게 돕는다. 내가 매일 아침 이불 밖으로 나와 출근을 하고 하루 8시간씩 수년을 꾸준히 일하며 그 과정에서 차근차근 업무 경력을 쌓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월급의 힘이었다. 입금에서 영감이 나오고 마감에서 작품이 나온다고 하듯이, 돈의 힘은 강한 추진력으로 그냥 혼자서 취미로 하는 거라면 미처 해낼 수 없었던 만큼의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자극한다. 그리고 이런 결과물들은 내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때로 이런 강제력은 우리의 삶을 해치는 위험이 되기도 한다. 돈의 힘은 자칫 잘못하면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뒤흔들어버린다. 실제로 대부분의 일들은 돈을 받는 순간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긴급하고 중요한 일이 되어버린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은 타인과의 계약이기에 이를 어기거나 문제를 일으킬 경우 어쩌면 생계를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돈을 받는 일은 나에게 가족, 건강, 사랑, 행복 같은 것들보다 훨씬 덜 중요한 가치이지만 현실의 삶에서는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1순위의 일이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자칫 마음의 균형을 잃어버리면 살기 위해 하는 일이 그만 삶을 모두 잡아먹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언젠가 한번 늦잠을 자서 회사에 지각을 할 뻔한 적이 있었다. 아슬아슬 5분 전에 회사 앞 버스정거장에 도착했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횡단보도 신호등이 오래 바뀌지 않았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그만 버스 중앙차로에서 도로 맞은편까지 무단횡단을 했다. 그런데 그때 도로 맞은편에는 창문이 까맣게 선팅 된 버스가 서있었다. 나는 그 버스가 기사님이 불을 꺼둔 채 주차해둔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그 앞을 가로질러 달렸다. 그런데 내가 도로를 막 건너자마자 등 뒤로 버스가 쌩 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1초만 늦었다면 큰 사고가 날 수도 있었던 순간이었다. 그제야 가슴이 서늘해지며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깨달았다. 목숨은 지각하지 않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가치임에도, 그 순간 나는 지각해서 상사에게 혼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큰일로 느껴져 그만 목숨을 걸고 무단횡단을 한 것이다.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임에도 혼날까 봐 두렵고 초조한 마음에 그 순간 그만 내 삶의 우선순위를 헷갈려버렸던 거다. 물론 최선은 여유 있게 집을 나서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면 그 상황에서부터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지키는 선택을 해야 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포공항 스크린도어 사고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환승역에서 내리지 못한 회사원이 지각을 하지 않기 위해 억지로 열차에서 내리려다가 발생한 사망사고였다. 기사의 댓글에서 사람들은 그깟 지각이 뭐라고 아까운 목숨을 잃나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나는 기사를 보며 그게 남의 일 같지 않아 가슴이 먹먹했다. 돈의 힘은 그렇게 찰나의 순간 우리의 판단을 뒤흔들어버렸다.
출근은 힘들고 늘 주말을 꿈꾸지만 그래도 나는 내 직업을 좋아한다. 나에게 직업은 생계를 지탱해주고 좀 더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고마운 존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일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많이 있다. 돈의 힘이 우리를 속이지 않기를. 그리고 우리가 돈의 위협에 속지 않기를. 급하다는 말, 관행이라는 말, 다들 그렇게 한다는 말에 속지 않고 정신을 차려 자신을 지키기를. 우리의 성실한 노동이 우리의 삶을 해치지 않기를. 그리고 우리 사회가 돈의 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