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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사원 엘리스 Oct 24. 2021

#009. 돈 때문에 일합니다

월급은 좋지만 내 삶이 사라질까 봐 불안해

회사원이 되고 나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 하나는 내가 돈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점이다. 내 스스로 돈을 벌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돈 이야기를 하는 것을 무척 민망해하는 사람이었다. 돈을 빌려간 친구에게 언제쯤 돌려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지도 못했고 과외비가 들어오지 않아도 학생 어머니에게 말을 못 해 혼자서 맘을 졸여야 했다. 또 옷가게에 가서는 몇 번 옷을 입어보고 점원 언니와 대화를 나눴다는 이유로 썩 마음에 들지 않은 옷을 사기도 했고, 밤에 침대에 누워서는 다시 환불을 해야겠다고 맘을 먹었다가도 다음 날이면 가게 앞을 서성이다가 차마 환불하겠다는 말을 할 자신이 없어 그냥 포기하고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나는 정말로 돈 얘기를 하는 걸 힘들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의 이 소심함은 회사원이 되고 나서 완전히 달라졌다. 마트에서 받은 영수증을 확인해보고 할인 적용이 안 된 품목이 있으면 다시 결재를 해달라고 말했고, 환불해야 할 물건이 생기면 눈 딱 감고 들어가서 환불을 요구했다. 그건 우리 각자가 결코 쉽게 돈을 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서로 잘 알고 있다는 암묵적인 믿음 때문이었다. 상대가 어떤 고생을 하며 돈을 벌고 있는지 내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만큼 상대도 분명 내 고생을 모르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가끔 유튜브에서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라고 하는 백화점 VVIP 언니들의 쿨한 'FLEX'를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하지만, 현실의 나는 내 소중한 사람들은 먼저 챙기고 돌봐야 하기에 그렇게 쿨하게 살지 못한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서로의 절박함을 이해하면서도 봐주지 않고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스포츠 선수들처럼, 어쩌면 우리도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각자의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쩨쩨하고 깐깐하게 챙길 것을 챙기며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직업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돈 이야기는 필수이다. 물론 직업에는 자아실현, 소속감, 성취감, 건강한 일상 같은 많은 훌륭한 가치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일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출근하기 싫은 순간에도 알람을 끄고 침대 밖으로 나서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돈이다. 회사원에게 근로란 기본적으로 시간을 팔고 돈을 사는 거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일의 재미와 소속감, 자기 효능감 같은 감정을 느끼겠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것일 뿐, 기본은 타인을 위해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 월급을 통해 우리는 한 사람의 독립된 인간으로 스스로를 책임지고 나와 내 가족의 삶을 지키며 살아간다. 경제력을 갖고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며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는 확신은 도시라는 이름의 정글 속에서 한 사람의 개인이 자신감과 독립성을 갖고 살아가기 위한 중요한 기반이 된다.  


그런 점에서 경력단절의 문제는 여성의 삶에 중대한 위기가 된다. 한 개인이 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온전히 살아가기 위한 삶의 기반을 흔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계를 책임질 수 없게 되면 원치 않는 결혼생활을 억지로 지속하는 등 삶에서 마땅히 가져야 할 어떤 선택지들을 빼앗기게 된다. 개인의 자존과 독립을 훼손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 여성의 경력단절 문제를 둘러싼 논의를 보면 제일 중요한 돈 이야기가 빠져있을 때가 있다. 자아실현, 소속감, 성취감 같은 낭만적인 이야기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충분히 교육받은 여성들이 일자리를 잃고 오로지 'OO이 엄마'로 살아가며 느끼는 소외감,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손실에 주목한다. 물론 모두 맞는 말들이지만 이 이야기에는 노동의 고됨이 사라져 있어서 어딘가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은 분명 힘든 일임에도 여성들이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돈을 벌기 위해서다. 가족이 늘어나면서 가정을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경제력을 지키고 이를 통해 개인의 자존과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렇기에 경력단절의 문제에 있어서 남성도 힘들다는 이야기 또한 불충분하기는 마찬가지다. 육아만큼 노동도 고된 일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부부가 짊어지는 고됨의 총량은 같더라도 그 과정에서 각자가 치르는 대가는 분명 다르다. 출산과 육아의 과정에서 경력단절 여성은 양질의 일자리를 잃게 되면서 사회에서 자립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1차 세계대전은 여성의 사회적 권리를 끌어올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많은 남성들이 전쟁터로 떠나면서 일손이 부족해졌고 군수공장과 사무실 등 남성들이 떠난 빈자리로 여성 노동자들이 사회에 진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경제력을 확보하는 일은 다른 어떤 구호보다도 강력하게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켰다. 지금 우리는 직장에서 다른 어떤 숭고한 의미보다도 먼저 돈을 위해 일한다. 그런데 때로 속물 같고 말하기 부끄러운 그 돈은 사회라는 정글에서 개인의 권리와 자존과 독립을 지켜주는 든든한 힘이 되어준다. 매일 아침 출근을 하면서도 퇴근하고 싶고 월요일부터 토요일을 기다리지만 그럼에도 내가 회사원으로서의 삶을 사랑하는 이유다. '자부도 체념도 없이 말하거니와' 우리는 돈을 위해 일하며 살아간다. '일을 하고 돈을 번다'는 우리 사회의 룰을 존중하면서 그렇게 정직한 노동으로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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