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회사원 엘리스 Oct 24. 2021

#007. 꿈이 독이 될 때

월급은 좋지만 내 삶이 사라질까 봐 불안해

오래전 <힐링캠프>라는TV 프로그램에서 철학자 강신주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그날 한 방청객이 배우의 꿈을 포기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상담을 했는데 여기에 대한 강연자의 답변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바로 '꿈은 저주다'라는 말이었다. 그동안 나는 꿈이 당연히 좋은 것이라고만 생각해왔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꿈은 뭐니' '꿈을 찾아라' '꿈을 품어라' 같은 얘기를 들으며 꿈을 마땅히 가져야 하는 것으로 배우며 자라왔다. 우리가 자라며 들어온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꿈은 삶을 바꾸어주는 마법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나를 매료시킬 꿈이 나타나기를 꿈꿨다. 그런데 당연히 좋은 것으로만 알았던 꿈이 저주라니. 조금 어안이 벙벙해지는 기분이었다. 강연자의 말은 이랬다. '꿈을 이루지 못하면 평생 꿈 근처에서 배회하는 귀신같은 나를 보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루지 못한 꿈은 풀리지 않는 저주처럼 일생을 옭아맬 수 있다는 뜻이었다. 좌절된 꿈이 상처가 된 사람들을 떠올리자니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아서 입안이 씁쓸해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기대를 품고 살아간다. 몽상가든 현실주의자든 말이다. 누군가는 존 레넌처럼 배고픔이 없는 사회를 꿈꾸고 또 누군가는 오늘 회의가 빨리 끝나기를 꿈꾼다. 어떤 기대는 현실과 상당히 다르고 어떤 기대는 현실과 가까워 조금만 애쓰면 손에 넣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기대이든 언제나 조금씩은 현실을 엇나간다. 때문에 현실과 기대 사이에서 우리의 마음은 때로 긴장하고 때로 불안해진다. 


그런데 불안에 대처하는 방식에는 크게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 첫 번째는 나의 기대에 맞추어 현실을 바꾸는 방식이다. 가고 싶었던 회사에 취업하고 꿈꾸던 세계여행을 떠나고 워너비 몸매가 되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는 것이다. 이때 기대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쏟은 노력은 나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반면 두 번째 선택지는 현실에 맞추어 기대를 조정하는 방식이다. 영어공부를 예로 들자면 원어민처럼 되겠다는 비현실적인 목표 대신에 외국어 학습자로서 할 수 있는 수준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시간과 돈이 무한대로 있다면야 원어민처럼 되겠다는 목표도 불가능한 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튼 우리에게는 현실적인 제약이 존재하고 영어공부보다 더 중요한 일들도 많이 존재한다. 그런 만큼 내게 주어진 상황에 맞추어 마음의 기대를 조정하는 것은 불필요하게 실망에 빠지는 것을 막고 마음을 지키며 더 지혜롭게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준다. 그리고 세 번째는 바로 바꿀 수 없는 불안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우리에게는 때로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기대들이 있다. 나와 사랑하는 내 가족들이 아프지 않기를, 불의의 사고가 생기지 않기를, 나쁜 인연을 만나지 않기를. 그런데 우리는 외부의 위험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다치지 않고 상처 받지 않기 위해 평생을 무균실에 갇혀 살아갈 수도 없다. 이렇게 내 삶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수 없는 종류의 불안이라면 그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용기도 필요하다. 이렇듯 우리가 현실과 기대 사이에 발생하는 불안을 잘 대처할 수만 있다면 꿈을 꾸는 일은 우리 삶에 활력을 주고 우리를 성장시킨다. 


기본적으로 꿈을 갖는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좋은 삶에 대한 이상을 갖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의 삶을 하나의 멋진 작품으로 만들어가는 일은 사람을 반짝거리고 활기차게 만들어준다. 나는 꿈을 좇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에너지와 자신에 대한 애정을 좋아한다. 그들에게서는 꿈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스스로를 아끼고 존중하는 다정한 마음이 엿보인다. 다만 현실과 기대 사이의 간극에서 마음의 균형을 잃어버리면 꿈은 그만 독이 되어버리고 만다. 한때 스스로를 사랑하게 만들어주었던 꿈이 이제는 스스로를 미워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내게는 글을 쓰는 일이 그랬다. 나는 오랫동안 작가를 꿈꿨는데 등단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어느새 친구들이 하나 둘 등단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들과 비교하며 괜한 자괴감에 빠졌다. 그러다 보니 점점 책상 앞에 앉는 일도 두려워졌다. 나의 재능없음만을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한때 나를 설레고 빛나게 했던 꿈이 이제는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평생 꿈 근처를 배회하는 귀신'이 될 것만 같았다.  


다시 마음의 균형을 잡게 된 건 이 꿈이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생각하면서부터였다. 내 꿈의 이유를 생각해보는 일은 그것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 사실 내가 작가를 꿈꾼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근사해 보였기 때문이다. 어떤 책은 나를 매료시켰고 나는 그런 책을 쓴 작가들을 동경했다. 그들은 너무 대단해 보였고 글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새로운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일은 세상에서 제일 특별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나도 그들 중 하나가 되고 싶었다. 물론 이 마음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다만 한 가지 기억하려고 하는 것은 이 꿈도 절대적인 가치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내 꿈도 온전히 내 것은 아니며 사회의 가치가 투영된 결과였다. 꿈을 갖고 싶다는 마음, 특정한 표현을 근사하게 느끼는 마음, 예술과 창작을 동경하는 마음, 내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하고 싶다는 마음. 이런 마음들은 모두 우리 시대의 문화와 가치관과 욕망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사실은 나답게 살고 싶다는 마음조차도 분명 사회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런데 나답게 살고 싶다는 자아실현의 소망에 집착하느라 나를 미워하게 된다면, 이 모순된 상황이야 말로 정말로 나답지 못한 일이었다. 내 삶을 위해 꿈이 존재하는 것이지 꿈을 위해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내 꿈의 숙주가 될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내가 '평생 꿈 근처를 배회하는 귀신'이 되지 않으려면 정말로 내 꿈이 나를 위한 꿈, 그러니까 지금을 사랑하고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게 해주는 꿈이 맞는지 한 번쯤 내 편에서 내 꿈을 냉정하게 평가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이 말이 이루지 못한 꿈을 모두 신포도로 여기라는 뜻은 아니다. 나는 아직 작가의 꿈을 꾸고 있고 이 글도 그 꿈을 위한 노력의 일부이다. 다만 내 마음이 불안해지고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주려고 노력한다. '아직 하고 싶은 게 남아있다면 좀 더 해보렴. 그렇지만 언제든 멈추고 싶다면 멈춰도 좋아!'  


좋은 부모는 자녀에게 실패할 기회를 준다. 내 자신에게도 그렇다. 성공할 수 있는 재능이 아니어도 실패가 눈앞에 보여도, 그래도 한 번은 가보고 싶은 길이라면 가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어쩌면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이자 자신에 대한 선물인지도 모르다. 그만둘 기회를 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꿈을 위해 내가 쏟은 사랑과 애정의 매몰비용이 내 발목을 잡지 않도록 우리는 좀 더 용감해질 필요가 있다. 꿈을 향해 계속 걸어가든 그만 멈춰 서든, 무엇을 선택하든 괜찮다. 다만 어제의 선택이 오늘도 여전히 유효한지 물어보도록 하자. 꿈을 위해 살기보단 삶을 위한 꿈을 꾸기 위해서 말이다.  



소설 <너무 한낮의 연애>에는 아주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필용은 며칠 전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한 양희에게 롯데리아에서 햄버거를 사주며 묻는다. '오늘은 어때?' 양희는 필용의 물음에 무심하게 답한다. '사랑하죠, 오늘도.' 그런데 어쩌면 이 질문은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대할 때 필요한 질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사랑했던 것들이 내 삶을 초라하게 만든다면 나에게 햄버거를 사주며 이렇게 물어보자.  


오늘은 어때? 


이전 07화 #006. 꿈과 직업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