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회사원 엘리스 Oct 24. 2021

#005. 내 마음속 불안은 어디에서 왔을까

월급은 좋지만 내 삶이 사라질까 봐 불안해

가끔은 치사하지만 남들도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위로가 된다. 시험문제가 어려웠을 때, 새로 오신 팀장님이 깐깐한 분일 때, 어려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을 때. 지금 내가 힘든 건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그냥 원래 이 일이 힘들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면 지금의 상황이 그래도 조금은 더 견딜만하게 느껴진다. 그건 불안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지금 내가 느끼는 불안이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비슷하게 느끼는 불안이라는 걸 알게 되면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진다. 내가 능력이 없어서 내가 이기적이어서 내가 단단하지 못해서, 내가 느끼는 불안이 모두 내 탓만은 아니며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조금 더 잘못한 걸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은 좀 치사하지만 그래도 삶을 더 견딜만하게 만들어준다.


그런데 진짜로 어떤 불안들은 사회로부터 온다. 불안은 개인이 느끼는 아주 개별적이고 내밀한 감정이지만 동시에 한 사회의 사람들이 함께 느끼는 집단적 감정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공통된 사회적 조건과 가치 기준을 공유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느낀 두 개의 불안, 그러니까 생존에 대한 불안과 삶의 의미에 대한 불안도 바로 이런 종류의 불안이었다. 모두가 아주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이지만 사실은 사회가 만들고 모두가 공유하는 그런 종류의 불안 말이다.




첫 번째 원인: 생존주의

생각해보면 생존의 불안은 우리 사회 어디에서나 배경음으로 낮게 깔려있었다. 학생들은 대학입시와 취업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애를 썼고 회사원들은 미리부터 은퇴 이후의 생존을 걱정했다. 회사는 입사 이후 항상 위기 속에 있었고 사내방송은 1등만이 살아남는다고 외쳤다. 개인을 책임져주지 않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가 원하든 원하지 않는 경쟁의 안테나를 세우고 살았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초조해졌고 겉으로는 무심한 척하면서도 끊임없이 상대와 나를 비교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에서는 죄책감을 느꼈다. 어떻게든 남을 이기고 살아남으려고 하는 나는 왜 이렇게나 이기적일까. 세속적인 조건들로 사람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나는 또 얼마나 속물적인가. 나는 세속적인 조건으로 남을 평가하고 비교하는 내가 싫으면서도 거기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 계속 비교를 하며 남에게 뒤처지지 않게 자신을 관리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낙오돼버릴 것만 같았다. 이런 고민들 속에서 책을 읽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생존주의'라는 말은 이상하게도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그냥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알고 마음에 품고 살아온 살아온 불안과 죄책감이 단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의'라는 말이 붙을 만큼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사실, 그저 내 마음이 못나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와 삶의 조건에서 비롯된 문제라는 인식은 나로 하여금 스스로를 덜 미워하고 더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사실 생존에 대한 욕구는 생명을 가진 존재 모두의 공통된 본능이다. 그런데 바로 이 생존에 '~주의'라는 단어가 붙는다니, 이건 뭔가 조금 이상해 보인다. '~주의'라는 말은 이념이나 가치관을 뜻하는 단어이니까 말이다. 이 어색한 단어는 지금의 우리가 자연스러운 생존본능을 넘어 생존 자체를 하나의 이념이나 가치관으로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생존주의는 단순한 생존본능을 넘어서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느끼며 이를 위해 어떻게든 자신을 관리하고 스스로의 능력을 입증하려고 하는 청년세대의 세대 감정(김홍중)'을 뜻한다. 그리고 이런 생존주의의 가장 인상적인 특징 하나는 이 생존의 경쟁에 끝이 없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 더 이상 안전지대는 없으며, 취업으로 모든 경쟁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평가며 진급이며 이직 같은 라운드의 경쟁이 끝도 없이 계속될 것이었다. 


내가 즐겨 듣던 노래 SES의 '달리기'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지금은 비록 힘들더라도 이 경주가 곧 끝날 거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 실제로 우리는 '대학만 가면', '취업만 하면' 같은 말로 힘든 수험생활과 취업준비 기간을 버텨왔다. 그런데 회사원이 된 이후로도 경쟁은 끝이 나지 않았다. 진급을 하려면 좋은 평가를 받아야 했고 경력을 쌓고 더 좋은 직장으로 이직하며 계속 내 몸값을 올려야 했다. 그동안 고생한 만큼 맘껏 쉬어보려고 하면 마음속 불안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밀었다. '가만히 있으면 뒤쳐질지도 몰라. 네가 놀고 있는 사이 남들은 앞서 나가고 있는 걸.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이제는 분주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가 진짜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싶었지만 그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걸음을 멈추는 일은 불안했고 지금 당장 영어공부라도 하는 쪽이 마음 편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인생의 방향에 대한 고민은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일이 되어 자꾸만 나중으로 미뤄졌고, 나는 정확한 방향도 없이 무작정 뭐라도 스펙을 쌓는 그런 '게으른 부지런함'의 상태에 빠졌다. 생존이 최고의 덕목이자 가장 긴급한 목표가 된 세상, 대단한 삶이 아니라 그저 지금만큼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전력으로 뛰어야 하는 생존주의 사회는 우리에게 생존에 대한 불안을 끝없이 불러일으켰다.    


두 번째 원인: 자아실현의 이상 

기억이 안나는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항상 '무언가가 되어야 하는' 존재로 살아왔다. 인생의 첫 번째 생일에는 돌잡이를 하며 미래에 판사가 될지 의사가 될지를 골라야 했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매년 생활기록부에 적을 장래희망을 고민해야 했다. 어른들은 우리들을 '미래의 꿈나무'라고 부르며 우리에게 꿈을 가지라고 말하고 꿈이 무엇인지 물었다. 중학교 도덕 시간에는 메슬로우의 5단계 욕구를 배웠는데 그중 가장 저차원적인 1단계의 욕구는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였고 가장 고차원적인 5단계의 욕구는 바로 '자아실현의 욕구(Self-Actualization)'였다. 그걸 배우며 나는 자연스레 자아실현의 욕구가 생리적 욕구만큼이나 당연한 인간의 본성이라고 믿었다. 그 시절 우리에게 꿈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데, 당장 나중에 어떤 과에 진학하고 어떤 직업을 가질지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으니 미래에 무슨 일을 할지 고민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대학에 들어가고 몇 개의 교양수업을 들으며 나는 오랫동안 내가 당연하다고 믿어온 것이 꼭 당연한 것만도 아니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중 하나가 자아실현이라는 관념이었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공동체의 일원일 뿐 지금과 같은 방식의 개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중세의 사람들에게 삶은 이미 태어나는 순간 모두 결정되어 있었다. 중세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네 꿈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태어난 마을을 떠나지 못했고 해야 하는 일은 물론 종교까지도 이미 다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개인은 근대가 시작되고 사람들이 지역사회를 떠나 도시로 향하면서 그제야 등장하기 시작했다. 자유롭게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고 선택하는 개인 말이다. 그리고 개인이 등장하고 나서야 비로소 성장하고 발전하며 개인의 자아를 완성한다는 자아실현의 이상도 나타나게 되었다. 자아실현의 가치는 마치 세속의 종교 같았다.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사람들은 신의 뜻 대신에 인생의 의미를 추구했고 종교적 소명 대신에 자아실현을 꿈꿨다.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마음속에는 일종의 신성함과 숭고함이 들어있었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바라는 자아실현의 모습도 절대적이고 당연한 것이 아니라 시대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배가 고픈 건 생리적인 현상이더라도 이때 치킨이 생각나는 건 사회적 환경의 영향이다. 마찬가지로 자아실현 욕구 또한 우리가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추구하는지 살펴보면 우리가 속한 사회가 가진 문화와 가치관의 영향이 드러난다. 우리가 추구하는 자아실현의 주된 방식에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진리탐구이다.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서부터 현재의 대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Veritas)를 탐구하는 것에 헌신했다. 진리는 많은 이들에게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는데 이는 자연의 질서 속에서 신의 섭리를 발견하려는 범신론의 전통과도 이어져있다. 자아실현의 또 한 가지 방식은 바로 자기표현이다. 지금 우리에게 예술은 단순한 테크닉을 넘어 자아와 관련된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음악을 만들고 연주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고 창조성을 발휘하기를 꿈꾼다. 이런 자기표현의 소망에도 자연의 일부로서 내 속에 있는 신성을 발견하려는 범신론의 흔적이 엿보인다. 또한 우리는 한계에 도전하는 스포츠 스타의 모습을 보며 자기 극복을 동경하고, 국경 없는 의사회와 같이 약자를 돕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헌신과 노력에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그렇게 자아실현의 가치는 우리에게 단순한 생존을 넘어 스스로의 소명을 찾고 신성하고 숭고한 의미를 추구하며 살기를 요구한다.  



생존과 자아실현이라는 두 개의 가치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를 끌어당기며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다. 생존의 불안은 우리에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회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자아실현의 가치는 우리에게 흔들리지 말고 자신의 목소리에 집중하라고 말했다. 나는 그 둘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었고 서로 모순되는 이 두 개의 가치는 안과 밖의 긴장을 만들며 자꾸만 내 마음을 불안하게 흔들었다. 거대한 인력으로 파도를 흔드는 지구와 달처럼 말이다. 

         

이전 05화 #004. 두 개의 불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