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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사원 엘리스 Oct 24. 2021

#011. 일하는 삶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

월급은 좋지만 내 삶이 사라질까 봐 불안해

회사생활에 있어서 나는 제법 운이 좋은 편이다. 일도 제법 적성에 맞고 동료들도 좋은 분들을 만난 덕분이다. 다. 덕분에 나는 회사생활에 꽤나 만족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가끔 '현타'가 오는 순간이 있다. 부동산에 대한 뉴스를 들을 때가 그렇다. 일 년 내내 힘들게 일해도 아파트값 오르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니 도대체 일해서 뭐하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 아마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요즘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2~3년 사이 거의 두 배 가까이 오른 아파트값은 사람들에게 노동에 대한 회의감을 불러일으켰다. 일하는 대신 부동산이나 알아볼 걸, 하는 자조적인 생각에 이르면 일하는 지금의 내 삶이 참 하찮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노동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기독교 전통에서 인간에게 노동은 저주이자 축복이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는 아담과 이브가 신의 명령을 거스르고 선악과를 따먹는 장면이 나온다. 신은 이들의 불순종에 대해 벌하며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이 앞으로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에게 주어진 벌이 바로 노동이었다. 한편 노동은 고귀한 것이기도 했다. 로마 가톨릭을 비판하며 청빈을 외쳤던 수도원 운동의 전통은 기도와 노동을 중시했고, 이후 등장한 청교도 운동에서는 근면 성실한 노동이야말로 구원의 증거라고 말했다. 인간에게 노동은 비록 고된 것이지만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그런 만큼 노동은 비천한 것이자 동시에 고귀한 것으로 여겨졌다. 


노동은 분명 고된 일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노동을 가치 있는 것으로 믿고 정직하고 성실한 노동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왔다. 그런데 어쩐지 지금 나에게는 일하는 삶이 자꾸만 초라하게 느껴진다. 지금 우리에게 일하는 삶은 힘들지만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리석음과 무능의 상징이 된 것만 같다. 일하는 삶이 초라해지는 첫 번째 이유는 우리 사회가 노동에 제 값을 치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학 원론에서 돈은 가치 측정의 수단이라고 이야기한다. 가격이라는 기준을 통해 바나나와 수학 과외처럼 서로 전혀 다른 성격의 것들을 비교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가격을 보면 우리 사회가 무엇을 진짜 가치 있게 여기는지 그 진짜 본심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겉으로는 여전히 노동이 고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막상 현실의 노동에 대해서는 제대로 값을 치러주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일해도 아파트 값 오르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는 현실은 우리 사회에서 노동의 가치가 어떻게 대우받는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일하는 삶이 초라해지는 두 번째 이유는 노동을 통해 더 이상 미래를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활력은 내가 노력하면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서 나온다. 하지만 돈을 버는 속도보다 집값이 오르는 속도가 더 빠르고 그래서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삶이 제자리걸음일 뿐이라고 느낄 때 우리는 무력감에 사로잡힌다. 노동이 삶을 바꿀 수 없다는 확신이 커질수록 우리에게 일하는 삶은 무의미해진다. 그리고 노동이라는 썩은 동아줄 대신에 부동산, 비트코인, 주식 등 삶을 구해줄 새로운 동아줄을 찾아 헤매게 된다. 


일하는 삶이 초라해지는 세 번째 이유는 열악한 노동환경이다. 일터에서 일어나는 직장 내 갑질과 산업재해는 우리 사회가 노동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특히 아이러니한 것은 피해자의 일실수입을 기준으로 계산되는 산재의 보상 방식이다. 저임금 노동자일수록 고위험에 노출되고 사고 이후에도 적은 보상을 받는다. 실제로 스크린도어 수리를 하다 사망한 '구의역 김 군'의 산재보상금은 8천만 원에 불과했다고 한다. 서울 아파트 방 한 칸도 되지 않는 돈이다. 가해자의 잘못에 대해서는 가해자의 소득과 무관하게 벌금이 매겨지고 피해자의 손해에 대해서는 피해자의 소득에 비례해 보상이 이뤄지는 지금의 방식은 저임금의 노동자에게 차별적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노동환경은 노동을 '안 할 수 있다면 안 할수록 좋은 것'으로 만든다. 최근 너나없이 이야기하는 경제적 자유의 열풍에는 노동에 대한 비관과 무력감이 짙게 묻어난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은 '안 할 수 있다면 안 할수록 좋은 것'이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일을 해서 삶을 지탱해야 한다. 일하는 삶을 초라하게 만드는 세상 속에서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몇 가지 사실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그 한 가지는 내가 하는 노동이 사회에 대한 존중이자 책임감이라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먹고 자고 입고 사용하는 모든 것들은 타인의 노동에 빚지고 있다. 매일 지하철을 타고 구내식당을 가고 커피를 마시고 택배를 받는 그 모든 일들은 타인의 노동 덕분에 누리는 것들이다. 내가 남들에게 도움받은 만큼 나도 내 몫을 하겠다는 생각, 이 세계를 굴리는 노동의 총량이 있다면 그중 70억 분의 1을 감당하겠다는 생각은 초라해지는 마음을 단단하게 잡아준다. 노동을 통해 사회에서 제 몫을 다하겠다는 마음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갖는 책임감이자 우리 사회의 규칙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이 마음과 이 존중이 무능과 어리석음이라는 꼬리표로 되돌아오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또 한 가지는 아주 보통의 노동도 충분히 귀하다는 사실이다. 가끔 노동문제를 다루는 글들을 보면 근로자들은 대개 '숭고한 바보' 혹은 '배부른 악당'으로 그려지는 것 같다. 주어진 일에 어리석으리만치 헌신하는 바보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월급을 축내는 철밥통이 그것이다. 마치 여성을 '성녀'와 '창녀'로 나누는 문법처럼 말이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많은 회사원들은 그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보통 사람들이다. 우리는 늘 출근을 하면서도 퇴근을 기다리고 오늘 하루는 별 일 없이 '월급루팡'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꿈꾸지만, 그러면서도 막상 일을 시작하면 나름의 재미와 기쁨과 책임감과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간다. 때로 상사에게 무례한 말을 듣고도 카드값을 떠올리며 꾹 참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저 무기력하게 자신을 방치하기보다는 언젠가의 소소한 복수와 '사이다'를 꿈꾼다. 우리는 무기력한 희생자가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애정과 존중을 가진 사람들이다. 노동문제에 있어서 '그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노동이 더 가치 있는 것이기에' 우리가 하는 이 보통의 노동이 더 대우받고 존중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라는 댓글을 본 적이 있다. 어떤 연예인의 영상에 팬들이 남긴 댓글이었다. 당시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덕담이었는데 가만히 보고 있자니 이 말은 어딘가 조금 기묘해 보였다. 돈을 많이 벌라는 말은 굉장히 자본주의적인 덕담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연예인이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팬들이 많은 소비를 해주어야 했는데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 말은 자본주의의 논리와 상충했다. 이익 극대화를 추구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와는 맞지 않았다. 그러니까 타인이 한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고 거기에 대해 제 값을 치르겠다는 이 말은 어쩌면 굉장히 전복적이고 급진적인 말이었다. 그리고 이 말처럼 정말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타인의 노동에 대해 근사한 말이 아닌 진짜 돈으로 제 값을 치르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의 노동이 초라해지지 않는 세상 말이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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