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은 좋지만 내 삶이 사라질까 봐 불안해
학생 시절 내내 나에게 '진짜 인생'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것이었다. 삶은 언제나 유예 상태였다. 중고등학생 때는 대학입시를 준비했고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졸업 이후의 삶을 준비했다. 취업 스펙을 쌓는다거나 전문대학원을 알아본다거나 자격증을 준비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나는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무급인턴을 하면서 법인카드로 사주는 참치에 감격했고, 시끄러운 술집 위 원룸에서 가끔 바퀴벌레와 마주치며 살면서도 이 모든 걸 '일시적'인 '낭만'이라도 생각했다. 지금의 삶은 진짜 내 삶이 아니며 머지않아 유예되었던 진짜 내 삶이 시작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회사원이 되고 나서야 나는 이제야 내 진짜 인생이 시작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 이상은 경험이란 이름으로 무료봉사를 할 필요 없이 내가 일한 만큼 그 달의 월급으로 대가를 받는 삶, 그리고 낮에 열심히 일한 만큼 퇴근 후에는 당당히 쉬어도 괜찮은 삶 말이다.
그런데 회사생활에 익숙해지고 제법 신입 티를 벗기 시작할 무렵, 취업문턱을 넘었다는 감격이 사그라듦에 따라 내 마음속에 슬슬 잊고 있던 불안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는 정년이 보장되지 않는 사기업이니 늦기 전에 공기업이나 공무원을 알아봐야 할까. 아니면 퇴근 후에 자격증을 공부하는 건 어떨까. 아니면 경력을 살려 더 높은 연봉을 주는 회사로 이직해야 할까. 나는 주위의 동료들을 보며 나도 하루빨리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조바심이 났는데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억울함과 불만이 쌓였다. 평생을 미래를 위해 유예하다가 이제야 겨우 진짜 내 삶이 시작된 것 같았는데 또다시 미래를 위해 준비를 해야 한다고? 그럼 도대체 내 인생은 뭐지? 도대체 언제까지 미래를 위해 살아야 하는 거지?
나는 기본적으로 자기 개발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개발의 소망 안에는 스스로의 삶을 더 성장시키고 발전시키려는 자신에 대한 사랑과 기대가 녹아있다. 특히 업무능력을 향상하려는 노력 속에는 자신의 일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다. 일에서 느끼는 몰입의 기쁨은 우리가 삶에서 느낄 수 있는 특별한 희열 중에 하나이다. 또한 자신의 일에 충실하려는 마음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직업윤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개발의 요청 안에는 자기 착취의 위험 또한 존재한다. 생존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늘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특히 자신의 노동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회사원이라면 외부의 시선으로 냉정하게 자신을 평가하고 스스로의 상품성을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외부의 기준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점검하고 부족함을 채우라고 채찍질한다. 그리고 이렇듯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자기 개발은 자기 착취가 된다. 특히 생존에 대한 불안은 우리를 게으른 분주함 속에 빠뜨려버린다. 삶에서는 가끔 걸음을 멈추고 삶의 방향을 점검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생존에 대한 불안은 우리가 멈춰서는 것을 못 견뎌한다. 내가 멈춰있는 사이 경쟁자들에게 내 자리를 추월당할 것만 같은 까닭이다. 그렇게 우리는 방향도 모르고 무작정 달리는 러너처럼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스펙을 쌓으며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불안을 달래기도 한다.
우리는 종종 자기 개발은 지치고 가만히 있기는 불안한 순간들을 마주한다. 우리 속의 노예 감독관이 꾸물대지 말고 나가서 일하라고 채찍을 휘두르는 순간이다. 이런 순간이면 나는 으슥한 산길에서 외는 주기도문처럼 몇 가지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첫 번째는 자기 개발에 완성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은 끝이 없다. 영어를 공부하고 나면 제2외국어가 필요할 것 같고, 머신러닝을 배우고 나면 통계도 알아야 할 것 같다. 내가 멈추기로 마음먹지 않는 한 결코 끝이 나지 않는다. 두 번째는 내가 쌓는 스펙이 미래에도 필요할지는 알 수 없다는 거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동네 곳곳에 비디오방이 있었지만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서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지금 내가 쌓는 스펙도 그렇다. 지금은 유망해 보여도 미래에는 사라진 기술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너무 욕심내지는 말자. 세 번째는 하고 싶은 만큼만 하자는 말이다. 불안함을 달래고 싶다면 달려도 좋고 자기 개발이 지친다면 멈춰도 좋다. 자기 착취라고 자책할 필요도 더 달리지 않는다고 화낼 필요도 없다. 어떤 선택이든 매 순간 나의 감정을 더 배려해주고 내 자신을 덜 혼내도록 하자. 자기 개발이라는 게 꼭 해야 하는 것이 아니듯 절대 하면 안 되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언젠가 친구들과 미래 세계에 대해 수다를 떤 적이 있다. 마침 토익시험을 준비하던 무렵이었는데 빨리 AI가 발달해서 번역도 척척 해주고 코딩도 척척 해주고 그래서 공부를 안 해도 되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거기 있던 친구 중 한 명이 물었다. 그럼 너는 그때 뭘 하고 싶니? 생각해보니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서 맛있는 것을 먹으며 싱거운 농담을 하고 노는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처럼 말이다. 회사일이나 공부처럼 지금 내가 목표를 갖고 몰두하는 자기 개발의 대상들은 언젠가 기계가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때가 되어도 절대 기계로 대체하지 않을 것들이 있다. 바로 놀이다. 맛있는 것을 먹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함께 장난치고 농담을 하는 일, 그것만은 절대로 기계에게 맡길 수 없다. 옛날 조선의 선비들이 테니스를 하는 서양인들을 보고는 '그리 힘든 것을 머슴에게나 시키지 왜 직접 하느냐'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의 진위여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서양인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신나게 뛸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테니스가 일이 아니라 놀이였기 때문일 거다. 그런데 만약 모든 것이 기계로 대체되는 시대가 온다면 어쩌면 그때 나는 진심으로 좋아서 우리가 자기 개발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때가 되면 나는 진심으로 영어공부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 실용성 따위는 아무것도 없이, 마치 예술작품을 감상하듯 그저 한 문장을 즐기기 위해서 하는 공부라니 어쩐지 근사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