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무거움

'에세이 빠나콘' 두 번째 이야기

by 스미스

개인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메일링 서비스인 '에세이 빠나콘'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곳입니다.

구독자분들께 전달된 메일이 2주 후, 이 곳에 공개 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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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4일 두 번째 메시지 : 말의 무거움


“넌 왜 이렇게 말이 없냐.”


이런 말을 가끔 듣는다.

정확히 세어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남자가 왜 이렇게 말랐냐’는 말 다음으로 많이 듣는 표현일 거다.

명확한 답변이 떠오르지 않아 그저 웃음으로 때우는 질문들이다.


웃음이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나는 왜 이렇게 말이 없을까에 고민보다는 그들이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에 대한 생각이다.


‘말이 없는 내가 부러워서 그런 게 아닐까.’


말을 하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는 나의 모습이 부러운 걸지도 모른다.

묵언 수행을 하는 스님들을 공경하는 마음과 비슷한 게 아닐까.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내 모습이 보인다.


내가 추측한 것처럼 좋은 의미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진 않겠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을 것 같다.

말을 하지 않아 재미가 없다거나,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하라는 메시지로 해석해야겠지.

사실상 질문이라기보다는 질문을 가장한 핀잔인 셈이다.


유튜브가 보편화되면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내 생각을 말할 기회가 생겼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은 물론이고 카카오톡 단체채팅방에도 라이브 기능이 생겼다.

적당한 전자기기만 있으면 누구하고도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대가 된 거다.

기술이 진보함에 따라 말의 통로가 늘었고, 자연스럽게 목소리도 커졌다.


하지만 그만큼 듣는 귀가 많아졌는지는 의문이다.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 비해 듣는 사람은 훨씬 적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억지스러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음공해’를 피할 수 있는 장소가 줄어들었다고나 할까.

친구를 삭제하고, 팔로우를 끊고, 카카오톡의 숨김 기능을 활용해봐도 과격하고,

폭력적인 목소리들은 불쑥불쑥 나타난다.

따뜻한 대화보다 주장과 주장이 대립하는 토론장의 풍경이 익숙해진 듯한 느낌이다.


양보다 질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건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만이 아니다.

나는 말을 설명할 때 이 표현이 꼭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수식어가 덕지덕지 붙은 말을 늘여놓는 것보다 묵직한 한 마디의 문장이 훨씬 감동적인 것처럼 말이다.

내가 평소 말을 아끼는 이유도 이와 유사한데, ‘재미없는 사람’이 될지언정 ‘말이 가벼운’ 사람을 피하자는 생각이 담겨있다.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맞았다. 이 팀은 아니다“


반복되는 폭력으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한 최숙현 선수의 일기장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짧은 문장에서 느껴지는 심리적 중압감이 너무 절절해 기억에 남았다.

받은 고통을 억지로 눌러가며 일기장이 써 내려간 흔적이 눈에 보이는듯해 안타까움이 더해진다.

애써 여러 말을 보태지 않아도 ‘말의 무거움’에서 전달되는 메시지는 묵직하다 못해 무겁기까지 하다.

정작 말해야 하는 사람이 말하지 못하는 상황을 목격할 때면

‘소음공해’에 대한 불편한 시각은 더 깊어지기도 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해미(전종서)’가 춤을 추는 장면이다.

극 중에서 해미는 아프리카를 여행하며 춤을 배웠는데, 이 춤은 원주민들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추는 춤이다.

해가 지는 노을에서 춤을 추는 해미의 모습을 영화는 꽤 긴 시간 동안 카메라에 담아낸다.

아무 말을 하지 않고서도 관객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감독은 보여주고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참가하는 행사에서 말을 강조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 해 동안 느꼈던 소감이라든지, 감사 인사를 나누는 건 기본이고,

가끔은 원치 않는 건배사를 해야 할 때도 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수다쟁이가 되는 것과 비슷한가 보다.


나는 앞으로도 말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말을 가볍게 하지 않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에게 내 주장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먼저 듣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말의 무거움을 깨닫고 듣는 즐거움을 길러보려는 노력이다.


“넌 왜 이렇게 말이 없냐”


앞으로도 무례한 질문 앞에서 배시시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고요한 외침이 얼마나 큰 울림을 주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시끄러운 확성기 소리보다는

깊은 산 속, 웅덩이에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 소리가 되기를 꿈꾼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오늘은 고요한 밤을 맞이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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