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빠나콘' 열일곱 번째 이야기
살다 보면 한 가지 단어에 꽂히는 순간이 있다. 책을 읽을 때나, 간판들을 스쳐 지나갈 때, 음악을 들을 때 그런 느낌을 간혹 받는다.
‘게슈탈트 붕괴’ 현상과 비슷한 느낌이지만 약간 차이가 있다. 전자가 단어에서 낯선 느낌을 받는 거라면 후자는 단어에 호감을 느끼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단어를 계속 사용하고 싶어진다.
예전에 ‘기하급수적’이라는 말에 꽂힌 적이 있다. 수학을 못 했기 때문에 기하급수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했지만, 말의 어감이 마냥 좋았다.
그냥 이 말을 쓰고 싶어서 사소한 것에도 ‘기하급수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사용했던 기억이 난다. 가령, ‘이 부분에 대해 기하급수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식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완전히 틀린 문장이지만 그 단어를 썼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요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무용’이다. 몸짓을 뜻하는 무용(舞踊)이 아니라, 쓸모가 없다는 뜻의 무용(無用). 최근 인스타그램에서 미스터 션샤인 관련 사진을 본 뒤로 이 단어가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난 원체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웃음, 농담, 그런 것들”
쓸모없는 것들을 좋아한다고 당당히 밝힐 수 있는 김희성이라는 캐릭터의 태도가 멋있었다.
뭐랄까.. 낭만적 자존감에서 빛이 난다고나 할까.
무용한 것들이 점차 도태되고 있는 현실에서 무용한 것들을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다. 마치 학벌 사회를 비판하며 서울대 자퇴를 선언하는 학생들을 볼 때나, 출근길 지하철에서 유유히 시집을 읽고 있는 어떤 사람을 발견할 때의 느낌과 유사하다.
지금처럼 유용(有用)론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기에는 그 모습이 더욱더 값지다.
최근 들어 유용론이 만들어 놓은 ‘인정 경쟁’이 더 심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존재 가치나 쓸모에 대해 입증해야 하는 순간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취업준비생에게 요구하는 과도한 스펙은 말할 것도 없고, 그간의 행적들을 정리한 포트폴리오 작성도 필수가 됐다. 평범한 사람 범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유용함에 대한 증거를 남겨야 하는 셈이다.
더욱더 무서운 것은 이러한 인정 경쟁이 전 세대에 걸쳐 벌어진다는 사실이다. 은퇴를 준비하는 노인들도 이를 피해가진 못한다.
몇 개월 전, 부산에 있는 한 오피스텔에서 노인들이 코로나 19에 집단으로 감염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알고 보니 그들은 그곳에서 주식과 암호화폐 투자에 관해 공부하고 있었다.
코로나 19를 확산시킨 노인들에 대한 비난이 인터넷 댓글에서 줄지어 이어졌지만, 나는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무엇이 그들을 투자로 내몰았는지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은퇴 이후의 유유자적한 생활도 누군가에게는 꿈만 같은 일인인지도 몰랐다.
돈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권력이나 명예, 정치적 효능감 따위에도 이러한 인정 경쟁이 깊게 배어있다고 생각한다.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심화하는 것도, 가짜뉴스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도 어쩌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나와 내가 속한 무리의 영향력을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노력인 셈이다.
나는 쓸모보다는 ‘가치’에 집중하는 삶을 살면 좋겠다.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냐보다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에 집중하는 사람이되면 좋겠다. 무엇을 남겼는지보다 무엇을 담아내려고 했는지를 주목하면 좋겠다.
가치를 발견하는 과정에서도 배우는 것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무용한 것들이 주는 유용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도 무용한 것들을 좋아한다. 꿈, 사진, 이야기, 소설,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이런 무용한 것들은 대개 시간의 공백을 허락한다. 지금 당장 무엇인가를 남기지 않아도 괜찮다는 안도감도 준다.
굳이 존재가치를 입증하려 하지 않아도, 내 존재를 느끼게 해주는 이런 무용한 것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