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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스 Feb 13. 2022

미리 쓰는 서른 즈음에

<생각 꾸러미>


1월은 대개 기쁘고도 씁쓸한 달이다. 1년에 한 번뿐인 생일을 기대하면서도 어느새 또 1년이 지나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지인들에게 받는 생일 축하 메시지가 마냥 기쁘지 않은 이유기도 하다.


최근 맞이한 생일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친구들로부터 진심 어린 축하와 함께 다양한 선물을 받았지만 생일 케이크에 적힌 '29'라는 숫자를 보면서 약간 허탈했다. 만약 초를 꽂았다면 케이크에 화산송이 같은 구멍이 숭숭 뚫렸을 것을 생각하니 더욱 그랬다. 나의 경우 빠른년생을 핑계 삼아 아직 29살로 살고 있었지만 친구들은 올해로 벌써 서른이 된 터였다.


서른 즈음에 맞이한 현실은 씁쓸하다. 10대 때부터 품어왔던 여러 가능성은 여전히 가능성으로만 남아있고, 이뤄낸 성취는 손에 꼽을 정도다. '돌도 씹어먹을 나이'라던 20대는 돌은커녕 모래조차 제대로 씹어보지 못한 채로 빠르게 흘러가버렸다. 대학 진학부터 입대, 취업까지, 꼭 지나가야만 한다는 길을 시간을 아껴가며 지나왔지만 그렇게 앞서가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해낸 것은 별로 없지만 해내야 할 것들은 점점 쌓여만 간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주변에 있는 친구들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무기력함과 부담감 사이에 있는 그 '어떤 것'이 또래 친구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셈이다.


누구보다 노는 것을 좋아해 항상 어디론가 여행을 다니던 친구 A는 지금 독서실에 앉아 공무원 준비를 하고 있다. 유럽부터 네팔에 이르기까지 체력이 닿는 한 계속 몸을 움직이던 A가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무척 낯설다. 아직까지 취업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소중한 경험을 비관하는 A를 볼 때면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최근 취업에 성공했지만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허탈함을 느끼는 B도 있다. 오랜 기간 이어진 취업 준비에 지칠 대로 지친 B는 취업에 성공하자 매우 즐거워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B는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 부담감과 그에 미치지 못하는 보상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끊임없이 자신을 갈아 넣어야 하는 이 일을 얼마나 오랫동안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다. B는 "이런 생각을 할 때면 가끔 공허하다"라고 털어놨다.


무기력함과 부담감 사이에 있는 그 '어떤 것'이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에게 미치는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혈기왕성한 A가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도록 하고, 종종 이어지는 음주 강요와 막중한 업무 부담에도 B를 출근하게 만든다. 학창 시절에는 성인이 되면 큰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믿어왔지만 막상 성인이 되고 보니 자유는 책임이라는 덩어리 중 아주 작은 일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어느샌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 부동산과 주식 이야기를 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나이 들었음을 느낀다. 주택청약이 내 삶의 구세주이고, 내 집 마련이 곧 인생의 진리로 여겨지는 사회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어느새 그러한 현실 한가운데 들어와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그러면서도 재테크 유튜브 채널을 힐끔거리고 새로운 노래 대신 몇 달째 똑같은 노래들을 듣고 있는 나를 보면서도 같은 감정을 느낀다.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김광석 - 서른 즈음에 中    


가수 김광석의 노래 중 등장하는 '비어가는 가슴'은 그의 꿈이나 이상향 등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새로운 것에 대한 공상보다는 현실을 살아가는 방법에 초점을 맞추는 자신을 되돌아본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실제로 김광석은 아는 후배로부터 서른 즈음을 맞이한 사람들이 답답함이나 재미없음과 같은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그것이 이 곡에 영감을 줬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의도가 맞는다면 그가 앨범을 발표한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여전히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셈이다.


누군가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인데 어느새 어른이 돼 버린 나는 작은 다짐을 한다. '어떤 것'의 압박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자유로울 때,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자고. 점점 비어가는 가슴을 계속 채울 수 있도록 부지런히 움직이자고. 이제는 씹어먹을 수 없는 돌을 조금씩 잘라서라도 먹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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