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미스 Feb 27. 2022

두 번의 장례식

<생각 꾸러미>

하루 사이에 두 번의 죽음을 목격했다.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열흘 전 아침, 눈을 뜨자마자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평소 전화가 잦은 편도 아니고, 특히 아침에는 좀처럼 통화할 일이 없었기에 의아해하면서 휴대폰을 귀에 갖다 댔다.


"너그 큰 이모가 이제 갈라 한다... 일단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연락했다"

담담해 보이는 말투와 달리 엄마는 이내 흐흑 하고 흐느꼈다. 언제 울음을 터뜨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삼촌이 응급실 들어가 있는데.. 곧 다시 연락할게" 눈물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애써 누르는 듯 엄마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이날은 시민운동에 앞장서다 돌아가신 한 목사님의 장례식을 취재하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조금 침울해진 기분으로 장례식장을 찾았다. 그곳에는 고인과 친했던 다른 목사님들과 그의 가족들이 장례를 치르고 있었다.

장례식장에 도착할 무렵 고인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장례예배가 시작됐다. 나도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에 함께 했다.


찬송, 기도, 묵념 순으로 예배가 이어졌다. 그곳에 모인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고인을 추억했다. 누군가가 보낸 근조화환이 속속 도착했고 추모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꽤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된 것 같았다.


취재차 그가 생전에 운영하던 한 복지시설을 방문하기로 했다. 장례식장을 조용히 빠져나와 그곳으로 향했다. 현장에 도착하자 인근 주민이 무슨 일로 이곳에 왔냐며 나를 보고 말을 걸어왔다. 나는 목사님의 부고 기사를 쓰기 위해 취재하고 있다고 짧게 답했다.


그는 목사님에게 뭔가 불만이 많은 듯했다. 들어줄 사람이 있어 반가운 것인지 주민은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놨다. 이야기인즉슨 고인이 인근 주민들에게는 평판이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얘기였다. 목사님은 복지시설을 운영하면서 인근 주민들과 적지 않은 갈등을 해온 것 같았다. 그는 목사님에게 소송을 당했다며 그가 언론에 나온 것처럼 선한 사람만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곳에 그 이야기를 모두 풀 수는 없겠지만 주민의 불만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기사를 쓰면서도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를 들었다. 좋은 사람인 줄만 알았던 그는 과거 '성추행'이라는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좋지 않은 사람이기도 했다. 회사에서도 이러한 점을 고려해 그의 부고 기사는 작게 싣는 것으로 결정됐다. 나는 서둘러 기사를 마무리하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엄마의 음성은 아침보다 더 단단해져있었다. 엄마는 일을 마치고 천천히 오라며 내게 주소 하나를 보내줬다. 울산에 있는 허름한 장례식장이었다. 차로 약 50분간 달려 도착한 그곳에는 우리 가족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엄마는 코로나19를 감안해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웬일인지 이날 이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는 가족은 우리 밖에 없었고, 가뜩이나 허름해 보이는 장례식장은 쓸쓸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루 사이에 장례식장 두 곳을 들렀지만 두 곳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똑같은 죽음이었지만 한 곳에는 많은 사람이 찾아와 애도를 표하고 있었고, 또 다른 한 곳에서는 가족들만 모여 고인과의 이별을 조촐하게 맞이할 뿐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이모는 누구보다 선한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뇌 기능이 정상적이지 못했던 그녀는 남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살기 위해 노력했다. 명절 때마다 나를 반가워하며 웃어주던 이모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할 정도다. 일상생활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지만 이름 따위를 자주 깜빡하곤 했는데, 이러한 증상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심해졌고 결국 그녀는 몇 년 전부터 요양병원 신세를 지고 있었다.

그녀는 최선을 다해 아이를 키웠지만 남편과의 이혼 탓에 아이와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주변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선하다는 것은 현실에서 좋은 의미로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러 차례 남들로부터 배신을 당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으나 남은 것은 기초생활수급자 딱지밖에 없었다. 세상이 그녀를 보는 시각은 그저 '이용하기 좋은' 사람이었다.


이모가 세상을 떠나던 날 밤, 우리 가족은 함께 모여앉아 그녀를 추억했다. 먼저 세상을 떠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이모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이렇게나마 그녀를 기억하는 것만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인 것 같았다. 눈물은 최대한 자제했다. 여러 차례 배신을 당하면서도 항상 밝은 에너지를 잃지 않던 그녀를 위한 노력이었다.


두 번의 장례식을 연이어 경험하며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죽음에 관해 생각했다. 모두 똑같이 겪는 한 번의 죽음이지만 죽음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은 사람마다 다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영향력이 꼭 그 사람의 가치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 알려진 죽음이 더욱 위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알려지지 않은 죽음이 가치 없는 죽음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었다. 나는 이날 모두가 아는 죽음보다 숨겨진 죽음을 찾아 써 내려가자고 다짐했다.

이 글을 그 어떤 누구보다 가치 있는 삶을 살다 떠난 큰이모에게 바친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리 쓰는 서른 즈음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