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술

김혼비 < 아무튼 술 > 리뷰

by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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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속에서 술에 대한 기억은

호통과 함께 시작된다.

때는 갓 대학교를 입학한 시기.

나를 포함한 모든 친구들이 한창 술이란 것에

눈을 뜨기 시작한 나이다.


그 당시 친구들과 나에게 술이라 함은

어른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의 상징이었다.


청소년기 누가 더 공부를 잘하냐 하는 것으로

암묵적인 서열이 정해지듯,

20살 무렵에는 누가 술을 잘 마시느냐로

지위고하가 나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렇게 '알쓰'라는 불명예를 벗어나기 위해

더 나아가, 술꾼이라는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 위해

어디서든 술을 마셔대며 경험치를 쌓아갔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그러한 대열에 끼지 못했다.

나는 친구들과는 달리

'빠른 년생'이었기 때문이다.


국가는 나에게 학교를 한 해

일찍 다닐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지만,

지금은 가장 좋아하는 일 중 하나인

음주가무를 할 수 있는 권리는

제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방법은 있듯이

암암리에 통용되는 방법은 있었다.


바로 나와 비슷한 얼굴을 가진

친구의 신분증을 빌려 쓰는 것.


이러한 행위의 공소시효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나이가 꽤 들었으니,

특별사면이라도 받기를 청해 본다.


아무튼 이런 방법으로

나는 한두 번씩 술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친구 A의 신분증을 가지고

음주 경험치를 쌓기 위해

어두컴컴한 던전으로 들어갔다.


그날의 수련 장소는

노래를 할 수 있는 주점으로,

우리는 노래타운, 줄여서

노타라는 표현으로 주로 썼다.


그렇게 다른 때와 같이

신분증 검사를 하게 되었고,

몇 번 성공한 적 있었던 나는 당당한 얼굴로

신분증을 사장님께 보여드렸다.


"A 씨 맞으세요?"

당시 20살들에게는

자신의 신분증임을 확인하기 위해

주소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물어보는 등의

추가적인 절차를 거쳤기 때문에

나는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친구의 주소나 주민등록번호는

이미 내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분증을 받아 든 아저씨는

꽤나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가.


나는 청문회를 앞둔 사람처럼 질문이 나오면

냉큼 대답해야겠다는 표정으로

아저씨를 쳐다보다 그의 변한 얼굴을 보며

살짝 위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아저씨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그 사이 나와 내 친구들은

얼마나 많은 눈빛 교환을 했는지 모른다.


잠시 후 아저씨는 나에게

자신의 전화기를 넘겨줬다.

뭐지 싶어 전화기를 건네받은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다. 사장님은 신분증을 빌려 준

내 친구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그 당시 나의 친구는 내가 찾아갔던

노래타운 맞은편에 있던 다른 노래타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사장님과 오며 가며 알게 된 사이였던 거다.


나는 술집끼리의 경쟁에서

일부러 라이벌 가게를 골라 들어갔는데,

라이벌끼리의 사이가 돈독한게 화근이 됐다.


사장님은 어쩔 줄 몰라하던

나의 표정을 보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네가 A니?"

그 이후에는 충분히 짐작할만한

결과가 일어났다.


술집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고,

나는 물론, 신분증을 빌려 준

내 친구 역시 사장님께

죄송하다고 사과해야 했다.


나는 그 이후 그 가게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지나가다가도 그 가게를 보면 사장님의

호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짜 20살이 되던 날, 나는 당당하게

그 가게를 찾아갔다. 이번엔 친구 A와 함께였다.

나는 1년 동안 몰래 숨겨서 쌓아왔던 경험치를

그날 그 가게에서 당당하게 풀 수 있었다.


< 아무튼 술 >


나의 창피한 어린 시절 이야기

(딱히 그렇게 까지 어린 시절은 아니다)를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오늘 소개하는 책이

술에 관한 에세이집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시리즈의 스무 번째 이야기인

'아무튼 술'은 만화책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얇은 책 속에는 작가 김혼비 씨의

재치가 그대로 녹아있다.

첫 술을 시작한 기억부터,

술꾼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려낸 이야기들은

누구나 공감할만한 추억을 제공한다.


그 속에 녹아있는 작가의 세계관이나,

음주관(!?)은 덤이다.

이 책을 읽으며 무엇보다

맘에 들었던 포인트는

작가가 자신의 삶을 그려내는 태도다.


그녀는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스케치하듯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 당시 느꼈던 마음이나,

어느 순간 보았던 광경들은

마치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그만큼 사물을 보는 태도가

섬세하다는 의미겠지.


작가 김혼비씨처럼 평소의 일상을

글로써 생생하게 담아낸다면

훗날 큰 가치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쉬운 부분은 있다. '술'이라는 소재에 혹해서

술에 관한 지식이나, 정보들을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독자들은 실망할지도 모른다.


책은 술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술을 매개로

작가의 인생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흡입력 있는 글은

읽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


우리 모두는 개인적이고, 독창적인

경험을 하면서 살아간다.


아무리 재미없는 일상을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그중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술'과 같이 키워드를 정해놓고

생각을 떠올린다면

재밌는 이야기를 떠올리기 쉽다.


나도 한 번 자그마한 소재로 글을 써보고 싶다.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이야기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교훈도

분명 존재할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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