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추석,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큰아빠가 내게 던진 물음이다. 그때쯤이면 내가 '언론고시'를 시작한 지 1년이 조금 넘은 시기였을거다. 나는 마치 숙제를 하지 않은 날, 선생님께 지목당한 것처럼 크게 놀랐다.
'우리 형도 있고, 사촌형도 있고, 여동생도 있는데, 하필 왜...나를'
송곳처럼 날카로운 큰아빠의 질문에 그냥 공부하고 있다고 짧게 대답했지만, 나도 내가 정확히 뭘 하고 있는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저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때로는 글을 쓰고, 신문을 정리하는 정도의 공부를 하는 내가 어떤 전문성을 기르고 있는건지도 혼란스러웠다.
"니가 무슨 학과라고 했지?"
선생님의 질문이 이어졌다. 이제는 단순히 '숙제 해왔어요'라고 얼버무릴 수도 없게됐다.
내 목소리는 다시 한번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정치외교학과요"
힘겹게 대답을 마친 나는 더 이상 질문이 들어오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그의 질문은 그칠 줄 몰랐다.
질문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기자를 해야한다던데, 큰아빠가 언론고시를 준비했어야 했다.
"보통 너네학과 나오면 어떤거하냐?"
지극히 평범한 질문이지만, 매우 난해한 질문이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떠올릴수 있는 모든 인맥을 동원했다.
은행원, 공무원, 언론사, 공기업, 사기업 등등.. 직업군은 매우 다양하고, 하는 직무도 전혀 달랐다.
큰아빠에게 뭐라고 답변해야할 지 모를 정도로, 스펙트럼이 넓었다.
'음..그냥 직장인이요' 이렇게 대답하면 모범답안일지 고민하고 있는 찰나, 결정타가 들어왔다.
"정치인하고있는 친구는 없냐?"
사실 이 질문만은 나오지 않길 바랐다. '큰아빠.. 그럼 철학과 나오면 다 플라톤되고, 영화전공하면 다 봉준호 되는가요.'(심지어 봉준호 감독은 사회학전공이다)
'경영학과 나오면 CEO되고, 국문학과 나오면 다 소설가, 또는 주시경선생 같은 분이 되겠냐고요..' 하고싶은 말은 많았지만 입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물론 정치인을 하고 있는 선배도 있다. 또 정치인을 목표로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한 친구도 있을거다. 하지만 대부분은 정치인이 되기보다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에서 만족한다. 어른들의 편견과는 달리 대학교의 전공과 직업이 일치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특히 문과에서는 더더욱. 실제로 한국개발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대졸자 2명 중 1명꼴로 전공과 상관없는 직업을 가진다고 한다. 이 비율은 OECD 회원국 중 최고수준이다.
큰아빠의 질문에 잔뜩 심술이 난 나는, 큰아빠가 화해의 의미로 주는 소주를 연거푸 3잔을 마신 뒤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그 속에서 깊은 상념에 잠겼다. 방은 조용하고, 알코올의 향기는 적당히 올라오는게, 딴 생각하기에는 최고의 환경이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한참을 생각해봤지만,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저 지금 내가하는 공부가 나중에 어떤일을 하더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겠거니하고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내가 정치외교학과에서 배운 것도 그와 비슷한 종류의 것이었다.
텍스트를 분석하고, 텍스트가 지닌 의미를 다른 사람과 나누고, 다른사람이 느낀점과 내가 느낀점을 서로 이야기하는 것. 내가 대학교를 다니면서 익혔던 공부의 총합이다. 물론 나는 지금도 언론고시라는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여전히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애초에 전공과 직업이 일치했다면, 한국에 경영학과가 809곳이나 있지 않을거다.(2019년 통계 기준), 또 정치외교학과도 91곳이나 개설되어 있는데 조금 더 많았다간 경영인, 정치인 공화국이 됐을지도 모른다. 지금 다시 떠올려봐도 큰아빠가 밉다.
얼마 전 친구와 대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 친구는 자신이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다면 3년간 미친 듯이 공부만 할 거라고 했다. 3년만 투자하면, 일생이 바뀔 수 있다나.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정반대의 대답을 내놨다. "내가 지금 고등학생으로 돌아가잖아? 나는 대학교를 가지 않을 거야."
그렇다. 나는 정말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다면 실컷 놀 생각이다. 고등학교 때 읽고 싶었던 책을 다 읽은 뒤, 무사히 졸업을 하고 해외여행을 떠날 거다. 해외여행이 안 된다면, 국내 어디든지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는 내가 느꼈던 점을 바탕으로 책을 쓸 거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여행기든 장르는 상관없이.
작가라는 직업을 깔보는 말은 아니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조금이라도 먼저 실행했으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서 나온 표현이다. 어차피 맨몸으로 부딪혀야 하는 게 청년이라면, 빨리 뛰쳐나와 부딪히는 게 낫지 않을까.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대졸'이라는 얇은 천 조각 하나를 얻는다면, 심지어 시간뿐만 아니라 돈까지 많이 지불해야 한다면, 가성비가 나쁜 장사일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네가 요즘 하고 있는 게 뭐라고?"
이번 추석이 100일 정도 남았나. 우리의 호랑이 선생님은 올해도 어김없이 질문을 던지실지 모른다.
나의 상황은 작년과 달라진 게 없어 더욱 마음을 졸일수도 있다. 아니 1살을 더 먹었으니 달라진 건 있는 건가.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건 내 '마음'은 작년보다 훨씬 성숙해졌다는 거다.
'직업보다 내가 가진 콘텐츠가 있느냐가 훨씬 중요하다는 생각'
나는 앞으로 '어디에' 소속되어 있냐보다 '무엇을'하는 사람인가를 더 고민하려고 한다.
어디에 있든지 내가 하고 싶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면 누군가는 알아봐 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