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질문에 답을 해보려 고민한 적 있었다. 한참을 떠올려봐도, 뚜렷하게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오히려, 질문에서 꼭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규정짓는 것 같아 반감도 들었다.
내가 고려 시대 이방원은 아니지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한 구절을 인용하고 싶어졌다.
흔히 청년을 꿈 많은 시기라고 정의 내린다. 과학적으로 청년기에 꿈이 많은 건지, 꿈을 이루지 못한 기성세대들의 염원이 담긴 표현인지 잘 모르겠다. 그 이유야 관계없이 청소년기~청년기를 지나는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꿈을 꿔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열정'이 청년과 항상 따라오는 수식어인 것처럼 꿈도 그 정도의 비중을 차지한다.
오늘은 꿈 없는 청년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어른들이 쉽게 비판하곤 하는 그 '현실에 안주한' 청년들 얘기 말이다. 사실 기성세대들의 생각과는 달리 그들의 내면을 깊게 들여다보면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글에서도 몇 번 언급했던 바 있지만, 나는 소위 꿈의 대명사로 불렸다.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게 많았고, 되고 싶은 것도 많았다. 만약 내가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처럼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분신을 만들어 하루씩 직업체험을 시켰을거다. 아니, 악덕업자처럼 무지막지하게 알바를 시켜서 본체는 놀고 먹고 사는 게 나을까.
내가 꿈의 대명사가 된 건, 그만큼 나와 반대되는 인물이 주변에 많았기 때문일 거다.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며 느낀 바로는 선생님이 추천해 주시는 직업 이외에 다른 직업을 꿈꾸는 친구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마치 직업의 '정석'처럼 항상 등장하는 선생님, 경찰, 소방관 등의 직업 외에 다른 것을 알기 어려웠던 것도 하나의 이유지만 성적을 잘 받아 더 좋은 학교로 진학하는 게 최우선 목표였던 것과 관계 깊다. 결국 그 당시에는 꿈을 선택하는 행위가 진학 이후의 목표로 치부된 셈이다(사실 꿈이 꼭 직업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서 문제는 더 커진다).
그러다 보니 일반적으로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도 내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를 아는 친구는 소수에 불과했고, 자연스럽게 그 친구들은 눈에 띄었다. 학생의 진로 선택을 의도적으로 유보시키는 문화에서, 꿈이 없는 아이들이 평범하다면 그 친구들은 초능력자에 가까웠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이 초능력자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 꿈을 가진 사람, 즉 목표가 뚜렷하고 가야 할 길을 잘 선택하는 사람들은 칭찬받아마땅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비난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건 비범함을 좇기 위해 평범함을 무시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영화 스파이더맨을 보면서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왜 거미줄을 뿜어내지 못하냐고 질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성세대들은 '꿈'이라는 마법의 단어를 사용해 청년들을 압박할 때가 있다. "너는 꿈이 없냐" "꿈을 이루려면 더 노력해야지" 따위의 말을 통해서다. 이때 꿈이라는 단어는 마법처럼 그때그때 모양이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는 도구가 된다.
어른들의 논리대로라면 대학교를 졸업해 공무원 시험을 치르는 사람, 자신의 전공과 관련 없는 직무에서 일을 하는 사람, 그럴싸한 직업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모두 꿈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애초부터 꿈이 없었거나, 노오력을 다하지 않았거나. 어감은 조금 다르지만 결국 두 가지 모두 '능력 없는 사람'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안정적인 하루를 보내고 싶다'거나, '퇴근 후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품고 있는 친구들이 많다. 꿈이 꼭 직업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걸 어른들이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꿈이라 쓰고 개꿈이라 읽습니다'
꿈에도 급이 있다. 흔히 좋은 꿈은 용꿈, 나쁜 꿈은 개꿈이라고 부른다. CEO나 대통령처럼 거창한 꿈은 용꿈이지만 작은 차를 사고 싶다거나, 저녁 6시에 칼퇴근하는 삶은 개꿈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나는 안다. 용꿈이 개꿈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좌절이 있었는지를. 그리고 그들이'야망이 없다'며 자신을 비난하는 목소리를 힘들게 견뎌냈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들의 작지만 소중한 꿈을 감히 개꿈이라고 부르지 못하겠다.
내게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가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어떠하지 않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하련다. '어떤'이라는 단어 속에는 좋고 나쁨에 관한 평가가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저 어떤 일을 하든지, 맡은 바 최선을 다하고, 퇴근 후에는 맥주를 곁들여 영화를 볼 수 있는 삶을 꿈꾸겠다. 이 꿈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평가받는지에 대해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그리고 나처럼 개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을 묵묵히 응원해야지.
"이타미야는 다이코(흥을 돋우는 남자)처럼 웃음을 만들어 붙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객실 한가운데를 얼른 물러 나와 세이타로 앞에 앉았다"
소설 <야채에 미쳐서>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이타미야는 작은 규모로 도매상을 운영하는 상인인데, 이 이타미야가 세이타로라는 거대 도매상에게 아첨을 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웃음을 만들어 붙이고'라는 표현이 너무 절절해 기억에 오래 남았다. 이타미야가 지금 존재하는 인물이라면 그는 용꿈을 꾸고있는게 틀림없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모든 사람이 이타미야 같은 인물이 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내 태도에 대해 누군가는 꿈이 없고, 패배주의에 찌들어 있다며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웃음을 만들어 붙이는 상황보다는 웃음이 절로 나오는 환경에서 살아가고 싶다.
퇴근 후 맥주 두 캔과 영화 한 편, 내가 가장 좋아하는 꿈의 공식이다. 거기에다 먹음직스러운 안주가 갖춰져 있다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일거다. 나는 꿈이 명사라기보다는 동사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되기보다 '무엇을 하는 사람'이 되고싶은 것도 비슷한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는 지금도 꿈을 거의 이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