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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스 Jul 02. 2020

인천공항공사 사태와 선택적 분노

2020년 7월 2일 스미스의 생각

평소에 내가 둥그스름한 사람이었다면, 오늘은 좀 ‘삐딱선’을 타보려고 한다.


최근 들어 어떤 사안보다 논쟁적인 인천국제공항공사 채용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서다.

흙수저이자 취준생으로서 양쪽 의견에 모두 공감하지만 아쉬운 부분이 많이 있다.



이번 논란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단연 ‘공정성’이다. 공정성이라는 가치를 사수하기 위한 청년들의 열망이 논란에 불을 붙이고 있는 모양새다. 정유라, 조국 논란에서도 자주 등장했던 공정성이라는 단어는 어느새 청년층을 대표하는 표현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청년을 ‘공정 세대’라고 지칭하는 언론도 가끔 보인다.


공정성은 사전적 의미로 ‘공평하고 올바른 성질’이다. 단어 자체는 맞는 말이고, 참 훌륭한 뜻이다. 하지만 문제는 공정이라는 단어 자체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한 번만 살아간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두 번의 인생을 살 수 없고, 아무리 못난 사람도 한 번의 인생은 살 수 있다. 삶과 죽음은 누구에게나 전적으로 평등하다. 하지만 삶을 구성하는 요소는 사람마다 전혀 다르다. 돈이 많고 적음과 가족관계, 주변 환경 등은 모두가 제각각이므로 일대일로 놓고 비교하기 어렵다. 누구나 평등하게 좋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살아가는 환경이 다르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하다못해 쌍둥이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생각에서부터, 행동 양식까지 전혀 딴판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의 환경을 바탕으로 남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 이걸 보고 누군가 ‘인생의 불확정성 원리’라고 말했다.


흔히 등장하는 공정성 논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생의 불확정성 원리를 무시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이름하여 노오력 주의자들이다. 그들의 논리는 대부분 노오력으로 끝이 난다. 어떤 문제건 간에 부정적 결과가 나오면 노오력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치부한다. 고졸 취업자가 저임금을 받고 일을 하고 있으면, 그건 대학을 가는 노오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라고 역설한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처우개선을 요구하면 과한 것을 요구한다는 비아냥이 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다. 왜 고졸 노동자는 적정임금을 받으면 안 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던지기는커녕, 고졸 노동자가 왜 대학을 가지 않았는지에 대한 고려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타인의 삶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매우 귀찮은 일이고 단순히 현재의 위치를 비교하는 건 손쉽기 때문이다.


시험이라는 제도는 노오력 주의자들의 주장을 한층 강화시킨다. 시험은 합격과 불합격이라는 이분법으로 사람을 쉽게 구분하는데, 이 과정에서 타인의 환경을 고려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하루에 2개씩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했든지, 값비싼 학원에 등록해 족집게 교육을 받았든지는 중요하지 않은 채 결과만 부각된다. 기계적 평등은 시험의 권위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다.


시험만이 정답인 세상은 공정성이라는 유령을 만들어낸다. 절대적으로 공정성을 보장할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하고, 그게 바로 시험이라는 생각 말이다. 시험도 치르지 않는 게 감히 ‘그 자리에 가려고’라는 태도도 이런 생각에서 비롯된다. 노오력 주의자들이 맹신하는 그 시험은 사람을 평가하는 완벽한 제도처럼 그려지기 일쑤다. 사실 그들도 시험이 인간을 평가할 수 있는 많은 요소를 생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게 최선이라며 합리화할 때도 있다.


“20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 별다른 경제활동을 하지 않으면서도 몇 년을 종일 공부만 할 수 있는 게 단순히 사람의 의지로만 가능한 게 아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로 알려진 오찬호 작가는 인천공항 사태에 분노하는 청년들이 말하지 않는 부분을 애써 끄집어내 쿡쿡 찌른다. 시험이라는 제도 자체가 환경적인 요인을 애써 무시한 채 공정함의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시험 통과와 실력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에 공감하면서도

시험 제도 자체를 문제삼기보다는 합격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에 몸을 던진다. 여기에는 이 시스템을 절대로 바꿀 수 없을거라는 우울감이 짙게 배여있다. 이는 다시 시험 제도의 대한 맹목적 믿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일단 나부터 살고 보자는 생각에 공감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공정성 논란에서 언론은 20대 청년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척하며 을과 을의 싸움을 부추기기도 한다. 좁은 취업문을 바라보며 공부하는 취준생과,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고용환경에서 근무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의 갈등이다. 왜 그들이 이렇듯 치열하게 경쟁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그들의 갈등 구조를 이용해 정권을 비판하려는 속셈이 있다. 평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이때다 싶어 청년 지킴이를 자처하는 국회의원들의 모습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서로를 물고 늘어지는 싸움이 끝난 뒤 정신을 차렸을 때 정작 상처를 입은 건 20대뿐일지도 모른다.


나는 정부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제도’ 자체를 비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번 인천국제공항 사례에서도 채용 전환 방식을 비판할 수 있을지언정, 정규직화 자체를 비난하는 건 맞지 않다고 본다. 누군가의 의견대로 정규직화는 유지하되, 완전 경쟁 방식을 도입하는 대안도 충분히 검토해볼 만하다는 생각이다.


한 가지 안타까운 건 청년들의 비판 방식이다. 공정성 논란을 살펴보면 청년들은 ‘분노할만한’ 문제에 대해서만 분노를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른바 선택적 분노다. 청년들은 구의역 김 군 사건에서 안전성 문제에 분노하기보다 서울교통공사 정규직 전환 문제에 더 분노했다. 제주도 현장실습 학생의 죽음, 발전소 하청 노동자 김용균 씨의 죽음보다 인천국제공항 사태에 더 크게 분노한다. 나는 이 현상이 그들의 일을 ‘내가 하지 않을 일’로 여기는 분위기와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안전 문제와 노동문제는 항상 제기되는데도 불구하고 ‘내 일’로 치부하지 않기 때문에 크게 분노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청년들의 선택적 분노와, 자발적 무관심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지켜보는 입장에서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한다.


누군가는 이 문제가 공정성의 문제라기보다는 계급적 박탈감에서 출발하는 논쟁이라고 말한다. 학벌과, 스펙이라는 기득권을 힘들게 얻었는데 이를 한순간에 빼앗긴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소리다.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인천공항공사 문제에 있어서 정답은 없다. 앞서 말했듯 공정이라는 단어 자체가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을 단정 짓지 않는 태도다. 누구나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인식하고 타협을 유도하는 게 필요하다는 의미다. 마지막으로 을과 을의 대립을 지적하는 오찬호 작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려 한다. 우리가 정작 분노해야 할 대상은 따로 있다.


정규직 시켜주면 노조 만들어 회사를 장악하고 주도권을 잡는다면서,
마치 과거 안기부에서나 등장할 시나리오를 진지하게 읊는 이유는
원래의 세상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과 하청으로 구분돼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험 없는’ 정규직 전환은 평등, 정의, 공정의 가치를 훼손했다면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생이 평등하지 않고,
정의로부터 멀어져 있는 걸 공정하지 않다고 바라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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