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고민> 시리즈
한 편집자가 고민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평소라면 그의 고민을 눈여겨보지 않았겠지만, 편집자라는 직업은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이기에 이 직업이 갖는 고충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그가 하는 고민은 앞으로 내가 하게 될 고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은 이렇다. 그 편집자는 자신의 앞으로 많은 원고를 투고 받았었다. 그러한 원고 중에 그를 만족시킨 것은 하나도 없었으나, 가장 최근의 것은 달랐다. 그는 그 원고의 작품성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원고의 저자가 경력이 없으며, 다른 저자들과 인맥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저자가 어려서 책이 나와도 관심 가져주거나 책을 구매해줄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편집자의 고민은 이러한 것이었다. ‘이것은 팔릴만한 책이 아니다. 그러나 의미는 좋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편집자는 이러한 문제에 끊임없이 봉착하며, 항상 고민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있다. 이상과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며 그 속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비단 이런 문제가 한국의 편집자들만 겪는 일은 아니었다. 제럴드 하워드는 ‘미스터 퍼킨스, 그는 죽었다’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퍼킨스는 맥스웰 퍼킨스를 말하는데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를 발굴한 미국의 편집자로 유명하다. ‘위대한 개츠비’의 제목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인생을 소재로 한 영화인 ‘지니어스’도 있을 정도이다.)
오늘 날 미국의 출판계는 전통적인 두 가지 기능 사이에서 어마어마한 혼란을 겪고 있다. 그 두가지 기능이란 독자들을 가르치고 교화시키며 희망을 북돋기 위한 더욱 고결하고 더 강경하게 주장되는 문명화의 사명과 그보다는 덜 강조되지만 세상 일이 그렇듯 늘 더 큰 영향력을 갖는, 소비자에게서 돈을 끌어내기 위한 상업화의 사명이다. 하나의 책으로 이 두가지 기능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다면 출판사(저자)가 얼마나 행복할까! 출판의 진정한 예술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원칙들을 화해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재된 긴장들을 조화로운 방식으로 어우러지게 하는 데 있다. 그러나 맨 밑바닥의 최종 결산 결과에서 올림포스 산으로 향하는 출판의 양방향의 길은 단층선을 따라 나 있으며, 여기가 바로 진지한 편집자가 살면서 본인의 임무를 다하는 곳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지질 구조판이 이동 하고 있는 가운데 지진이 일어나고 있으며 움직이고 흔들리는 모든 상황으로 맡은 바 소명,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상의 엄무마저도 다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즉, 벽들이 붕괴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 긴장들을 섬세하게 조화시키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책은 의미와 수익성 둘 다를 추구해야 한다. 책은 인류의 지식이나 문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의미와 사회적 가치를 따지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출판사들은 자신들이 문화의 심장과도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돈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책을 만드는 경우는 다른 상품에 비해 비교적 적다. 그렇지만 상업성을 추구하는 것이 출판의 숙명이기도 하기에 어려운 것이다. 애초에 판매를 목적으로 만든 상품인데, 오로지 판매만이 목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책이 참 애매한 지점에 있고, 그런 책을 만드는 출판사 입장에서도 참 어려운 지점에 있는 것이다.
책이 가지는 의미도 적당히 생각하고, 수익성도 적당히 고려해서 적당한 책을 만들면 가장 좋겠지만, 문제는 그렇게 '적당히' 조율하는 게 참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는 이러한 것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지식과 학문에 대한 냉소주의라든지, 의미가 아닌 재미만을 찾는 대중들 때문에 상업성과 의미에 괴리가 생기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잘 팔리는 책이라고 해서 반드시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잘 팔리는 책이지만 마케팅 전략을 잘 짜고 시장의 흐름에 잘 부합한 결과라는 것을 여실히 입증하기라도 하는 듯 헛소리를 열심히 늘어놓는 책도 많다. 실제 현장에서 편집자들은 때로는 의미만 너무 강조하다가 수익성을 놓치는 경우도 있고, 수익성만 너무 강조하다가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의미와 상품성 사이에서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상품성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편집자는 의미보다는 시장의 원리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편집자라면 이상만을 추구하기보다 현실감각과 냉철함을 갖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건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많은 편집자 선배들이 그렇게 말한 것을 따라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훌륭한 편집자는 발행인처럼 생각하고 계획하고 결정해야 하는 반면, 훌륭한 발행인은 편집자처럼 행동해야 한다. 편집자는 '문학적인 감각'에 더해 '산술적인 감각'을 갖춰야 한다. 색맹행세를 할 여유가 없다. 검은 글자로 찍힌 흑자와 빨간 글자로 찍힌 적자를 구별 할 수 있어야 한다." 사이먼 앤 슈스케 출판사의 설립자 링컨 슈스케가 한 말이다.
또 <양들의 침묵>을 냈다고 알려져 있는 리처드 마렉이라는 편집자는 '어쨋거나 수익성'이라는 제목이 붙은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편집자는 전적으로 한 가지 이유에서 고용된다. 그들이 입수한 책들이 그들이 고용되어 있는 출판사를 위해 수익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단순화한 면이 없잖아 있는 이 말은 돈에 굶주린 대기업의 새로운 음모를 반영한 것이 아니다. 내가 처음으로 출판계에 발을 들였던 3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출판의 역사를 연구하는 자들 역시 인쇄기가 발명된 이래 이 말이 사실이었다고 말한다.
편집자는 직장인으로서 또는 경영인으로서 자신의 본분이 무엇인지 항상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회사는 이윤을 추구하는 영리단체이고 봉사단체가 아니다. 출판사도 예외가 아니고, 출판사에 고용된 편집자도 예외가 아니다. 만약 회사 내에서 아무도 시장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회사의 재정상태는 어떻게 될 것이며 새로운 책은 또 어떻게 기획할 것인가? 재정상태를 고려하지 않아서 다른 책을 내지 못한다면, 새로운 가치와 의미도 생성해내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문화에 새로운 동력을 불어넣을 수 없기에 결과만 놓고 보면 안 좋은 것이다. 결국 편집자가 이렇게 해야만 작가도 마음 놓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고, 회사도 새로운 작가와 작품을 발굴하는 모험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품 자체만을 보지 않고 저자의 외적 요소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마케팅 전략을 짜지 못해 책을 출간하지 않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책은 어느정도 인지도에 의존한다. 저자가 어떠한 전문적인 경력을 갖추었는가? 저자가 책에서 제시한 방법을 얼마나 오래 실천했는가? 저자가 토크쇼에 출연하기에 적합할 만큼 자기 생각을 분명히 전달하고 호감형에 속하는가? 저자가 주기적으로 강연회를 여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여 책을 장기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가? 저자가 자기 분야의 기타 주요 저자들과 인맥이 있는가? 혹은 저자가 최고의 권위자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는가?
미국의 한 출판사 사장 토니 버뱅크의 말이다. 위의 고민하는 편집자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고, 자신이 투고된 원고를 내쳤다고 해서 자책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 저자파워가 부족해서 책을 출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
수익과 책이 연관되어 있다고 해서 군것질 같은 '나쁜 책'을 입수하기 위해 편집자를 고용하는 것은 아닐것이다. 실제로는 의미와 수익성이 따로 놀며 이분되어 있는 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의미/가치가 있으면 판매로도 직결된다는 것이다. 랜덤하우스 출판사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익을 거둬들인 책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이고, 맥밀란 출판사에서 1,2위를 기록한 책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전집>이다. 물론 영양가 있는 책들도 팔리지만, 판매량이 높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 편집자의 고민에 대해서 구체적인 지침을 내려줄 수 있다. 나는 지침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다시 편집자 선배들의 말을 인용해보겠다.
“개인적 취향과 직업적 취향은 다르다. 편집자는 상업적인 책을 휴가기간에 읽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책에 대한 감각을 반드시 키워야 한다.”(리처드 마렉)
어떠한 책의 절대적인 가치를 보고, 즉 대중적인 인기는 없지만 평단의 찬사를 받는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 책에 찬성표를 던질 준비가 되었다면, 그 책에 왜 열의를 갖는지를 천명하고 산술적인 계산을 하여 얼마만큼을 기꺼이 잃을 것인지, 혹은 잃을 준비가 되었는지 스스로 알자.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고민하는 편집자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우선 그 편집자는 왜 이 책에 열의를 갖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책을 낸다면 얼마만큼을 잃을 것인지를 파악한 뒤, 그것을 감수해야만 한다.
이런 이야기는 편집자와 그들의 일을 본격적으로 다룬 드라마 <중쇄를 찍자>의 등장인물 야스이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출간하는 책을 확실하게 성공시키는 반면 동시에 신인(작가) 밟는 야스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신인작가에게 역량을 넘어서는 과다한 업무를 맡겨놓고서도, 판매량이나 독자 반응이 열악하면 그 작가에게 더 이상 일을 맡기지 않고 새로운 사람을 찾는다. 잔인하다고 할 수 있지만 실적은 좋아 할 말 없게 만든다. 그런 야스이는 이렇게 말한다.
만화가는 최선을 다해 그리고 편집자는 그 노력에 보답한다.
진심을 다해 서로를 성장시키며, 그렇게 탄생되는 수많은 작품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작품을 만든다 해도 회사가 평가하는 것은 판매량
판매량이 전부다
이상만을 추구하며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좋은 작품을 만드는 데만 집중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드라마는 열정을 다 하고 꿈을 쫓았지만, 판매량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잡지가 폐간되어 그 동안 했던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되었던 야스이의 과거를 보여준다. 하고 싶은 일, 이상적인 일을 추구하는 건 좋지만 할 수 있는 일 자체가 없어져 버린다면 얼마나 열심히 해왔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열정도 좋고, 꿈도 이상도 좋지만, 회사라는 곳은 업무, 일을 하는 곳이다. 막연한 꿈만 좇을 수는 없으며 우리는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교훈을 <중쇄를 찍자>를 야스이라는 캐릭터로 풀어냈다.
야스이는 마치 출판계의 ‘다크나이트’ 같은 느낌이다. 다크나이트는 사회의 정의를 위해 싸우지만 그것이 드러나지 않고, 사람들의 오해를 사기 때문에 탄압받는다. 곤혹스러워하는 일을 대신 해 주지만 사람들 눈에는 악역으로 비춰진다. 야스이 또한 그렇다.
야스이: 그 때 말씀드렸던 코미컬라이즈는 아가리에 키누는 안 하겠답니다
다른 실력자를 찾아봐야죠. 대신할 사람은 많으니까요.
편집장: 그렇게 해.
야스이, 항상 고맙다
네가 확실하게 벌어다 주는 덕분에
다른 작품들로 과감히 모험도 하고 밀어붙일 수도 있는 거야
야스이: 월급 받는 만큼 일하는 거에요
야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