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디지털 시대를 맞아,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고 자신의 의사를 밝힐 수 있는 플랫폼을 가지게 되었다. 인터넷 뉴스에도 무수한 덧글들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블로그를 통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이제는 누구든 아무 글이든 써야하고, 아무 말이든 해야 한다.
과거에 작동했던 프레임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평생직장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비혼과 비출산이 급증하면서 가족마저 무너지고 있다. 혼자 사는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살다가 혼자 죽어야 하는 세상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반드시 다른 누군가와 연결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도 매일 주머니에 휴대하고 다니는 핸드폰 하나를 꺼내기만 하면 된다. 그야말로 초연결사회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 연결될까? 바로 글과 말이다.
글과 말이 넘쳐나는 것도 이 때문일지 모른다. 그런데, 이 넘쳐나는 말들이 좋기만 한 것일까? 분명 지식의 민주화를 이뤄냈다는 큰 성과도 있지만, 젠더문제나 정치현안에 대해 심각하게 대립하며 갈등을 낳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이 혐오의 표출과 상대방에 대한 배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140자 트위터에도 의표를 찌르는 핵심적인 글이 올라오기보다는 자기 생각을 아무렇게나 배출한 글이 많아지고 있다. 공감을 얻기 힘든 글과 말들이 인터넷 공간을 지배하고, 인터넷을 넘어서 현실까지 지배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의 풍경은 소통과 합의와는 거리가 멀다. 합리적인 공론장을 기대하기 힘든 시기다.
이러한 배경에서, 말과 문자와 진리의 관계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언어에 가장 본질적인 것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고 실제로 언어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들을 담은 글들이 책으로 나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다. 타인의 말들을 주워 담아 관찰한 <언어의 온도>를 쓴 이기주가 <말의 품격>, <글의 품격>을 잇따라 낸 것은 이 시대의 트렌드를 잘 읽어낸 것이 아닐까. <말이 칼이 될 때>의 흥행이나 브런치의 성장 등은 말과 글에 대한 관심이 높은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작업은 서양과 동양이라는 각기 다른 문명에서 이미 3000년 전에 끝났다. 우리가 하고 있는 논의들은 애초에 두 고대 문명에서 던졌던 질문들에서 전부 파생된 것이다. 언어에도 온도가 있어 언어가 갖는 그 느낌이 마음을 결정짓는 것인지, 언어는 발화자의 뜻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지. 그들이 정립한 철학을 살짝만 들여다보아도, 결국 우리는 그들의 생각을 조금만 변주하여 반복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각 문명의 철학은 고대 철학자들인 임제와 소크라테스로 대표된다. 동양은 선불교를 통해 말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정립하였다. 임제는 이런 선불교를 가장 잘 대표하는 선승이다. 서양에서 말과 글은 논리와 이성을 배태하는 수단이었다. 우리는 그 기원을 소크라테스에서 찾으므로, 서양철학은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임제와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여러 면에서 대립되고, 한가지 사안에 대한 다른 방식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임제가 속한 선불교에서는 진리나 인간의 마음은 말과 글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여긴다. 참된 자기는 언어 속에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묻는다. ‘도대체 어떤 물질이나 관념이 언어 속에 들어있다는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물질과 관념을 설명하기 위해 언어라는 수단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선승들도 인정한다.
그렇지만 선승들에게 그 한계는 명백하다. 언어로 표상되는 논리나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결코 해결할 길이 없는 딜레마나 역설로 가득 찬 물음을 그들은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들의 기행이나 말은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들은 그런 방식을 택한 것일까? 그것은 상식을 넘어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상식을 뜻하는 영어 단어는 common sense로 ‘공통된 감각’을 의미하는 말이다. 아버지나 어머니, 삼촌이나, 이모, 혹은 친구들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바로 커먼 센스, 즉 상식이다. 서양의 사고가 보편적인 것을 중시했다면, 동양의 사고는 보편적인 것의 한계를 잘 포착하고 개별적인 특수성을 좀 더 존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언어를 통해 우회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기행이나 선문답 등을 통해서 직관적으로 진리에 도달하려고 했다. 가령 선승에게 부처가 뭐냐고 묻는다면, “잣나무 똥 막대기”라는 식의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선승들은 상대의 내면을 바로 각성시키는 방법을 동원하려는 의도에서 이렇게 했다.
마찬가지로 "수처작주 입처개진(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 지금 있는 그곳이 진리의 자리이다.)"라는 임제의 말도 그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누구냐,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입장이 어떤가에 따라 달라진다. 주인이 무엇이냐에 대해 명확하게 제시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개인의 주관과 해석에 의존하는 말이며, 명확한 행동 지침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임제의 삶과 개연성 있는 해석에 바탕을 두고 합의된 부분은 있을지 몰라도, 여전히 애매모호한 것은 남는다. 철새정치인도 자신의 상황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 말을 썼고, 몇 십년 수도의 외길을 걸어온 스님도 이 말을 썼다. 건강관리사도 개인의 건강을 강조하기 위해 이 말을 쓸 수 있으며, 이제 학교에 막 입학한 신입생이 이 말을 자신의 삶의 지침으로 삼았던 용례가 존재한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어떤가? 소크라테스가 가르치는 길은 논리라는 긴 우회의 길을 통한다. 다만, 언어는 의미와 일대일로 대응되며, 대화를 전개하는 방식은 논리에 근거해있다. 같은 딜레마를 다루는데도 소크라테스는 명확한 말들과 논리로 딜레마라는 심연을 둘러싸 경계를 명확히 한다.
소크라테스가 사용하는 대화의 방식은 질문과 논리적 반박을 통해 대화자의 내면을 각성시키는 것이다. 언어와 논리가 필요 없다고 여기는 선불교와 달리 소크라테스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언어와 논리라는 사다리가 필요하다고 여긴다. 이점에서 동양철학과 결별한다.
서양의 문화적 전통은 로고스(논리를 통한 진리의 꿰뚫음)의 전통에 서있다. 반면 동양은 직관(순간적인 각성을 통한 진리의 획득)을 통해 세계를 포착하려고 한다. 이것을 그대로 반영해 설계된 것이 가르침과 배움의 텍스트인 소크라테스의 ‘산파법’과 임제의 ‘문답법’이다. 이 두가지는 깨우침과 깨달음이라는 관점에서 동일한 구조 속에 들어있지만, 사용하는 문법이 다르다. 하나는 철저한 논리의 길이었고, 다른 하는 전광석화와 같은 돈오의 길이었다. 이 길이 서구적 전통의 에피스테메(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배태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다른 길은 동양적 전통의 지혜를 추진하는 동양적 지혜를 응축하는 추진력이 되었다.
어떤 관점을 지지하는가에 따라 디지털 시대의 말과 글이라는 하나의 사안에 대한 관점이 달라질 수 있다. 140자로 쓰여진 특정 트위터 글에 대한 생각도 어떤 관점이냐에 따라 좋은 글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가 있다. 임제의 사상에 좀 더 동화되는 사람은 타인과 의사소통 할 때에 개인의 주관과 감성, 마음, 논리를 넘어서는 영역에 주목하려고 할 것이다. 여기에 입각해, 인터넷에 올라오는 감성 글, 주관적인 글, 개인이 쓴 글 하나하나를 전부 존중할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에 좀 더 동화되는 사람은 의사소통 할 때에 논리와 인간의 보편적인 감각(common sense)에 호소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합리적인 의사소통에 기반한 공론장의 공공성에 무게중심이 좀 더 쏠릴지도 모른다.
정리하면, 주관에 대한 존중을 통해 의사소통의 혼란과 갈등을 극복할 것이냐, 아니면 공공성에 대한 존중을 통해 의사소통의 혼란과 갈등을 극복할 것이냐로 현상에 대한 해결방법이 갈린다.
무엇이 답일까? 답은 정해져 있지 않고, 각자가 선택할 문제이다. 그렇기에 질문을 바꿔야 한다. 어떤 관점이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더 적절한 처방인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중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균형감각이란 양 극단의 정확한 중간 지점에 가만히 서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균형감각은 양극단을 오가면서 끊임없이 최적점을 탐색해나가는 과정이다.” 중용은 멈춰선, 고정된 명사가 아니라 움직이는 동사이다.
결국 서양과 동양의 화해하기 쉽지 않은 간극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현 시대가 당면한 갈등과 분열을 대하는 자세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답이 나지 않을 문제이지만, 서로가 왜 그와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지 입장과 조건을 고려해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공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부란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이 과정을 통해서 디지털 시대에 만연한 혐오와 갈등도 조금은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소크라테스와 임제를 다시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조던 피터슨이 현대 사회에 필요하다고 했던 ‘혼돈의 해독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