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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빛 Jul 11. 2019

6천만 대국민을 위한 것이 아닌 당신 한 사람을 위한글

<대통령글의 글쓰기>리뷰

'보편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를 명확한 기준이 존재할까?’ 나는 항상 지인들에게 ‘보편적인 감성에 호소한 글쓰기’를 주장했다. 그러나 항상 우리가 대화하면 보편적인 것이 과연 무엇이냐며 합의되지 않은 채로 이야기가 마무리 되었다.


상식. 영어로는 common sense.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감각. 대통령만큼 인간의 보편적인 감각에 호소하는 글을 쓰는 사람이 있을까? 6000만 국민을 설득시키려고 해야 하니 대통령이야말로 우리나라 국민의 보편적인 감성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 책을 펴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글쓰기에 대한 답을 내려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내린 결론은 보편적인 감각이란 없다는 것이다. 보편적인 감각이 과연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러한 것은 이렇다 할 한 줄로 정의내릴 수 없다는 것으로 귀결되고 만다.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사장 생각이 다르고, 직원들 생각이 다르고, 기자의 생각이 다르고, 택시기사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6천만 대국민이 보편인가?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은 한명, 한명의 인간이지 6천만 대국민이 아니다. 6천만 대국민은 실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한낱 범주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보편은 모든 것을 포괄하기는 하나, 상당히 공허한 개념이다. 보편은 특수한 것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결국 보편적인 감성에 호소한다는 것은 모든 특수한 것들을 고려하여 말하는 것이며, 특수한 것들 사이의 차이를 절충하는 것이다. 

여기 커피 한줌이 있다. 커피콩 한개가 추가되도 커피 한줌? 커피콩 두개가 추가된다면? 커피한줌이라 치자. 커피콩 100개가 추가된다면? 그래도 변함없는 커피한줌인가? 커피 한줌을 커피 한줌으로 만들어주는 그 기준은?

여기 씽큐베이션 강의실에는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인간'이란 이름nomina으로 한데 묶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 이름은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말그대로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대통령들은 이러한 이치를 일찌감치 깨닫고 글을 썼다. 여러 대상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각기 달랐기에 그들은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종종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여의도 농민시위에서 사망자가 발생했을 때였다. 인권위원회는 경찰의 과잉진압이 사망의 원인이라고 발표했다. 노 대통령은 즉각 대 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연설의 대상은 농민과 유가족만이 아니었다. 시민단체와 공권력을 집행하는 경찰과 전경을 자식으로 둔 부모도 있었다.


각 대상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달랐다. 농민에게는 ‘경찰이 잘못했다. 우리에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사죄하라’ 둘째, 시민단체를 향해선 ‘공권력이 정도를 넘어 행사되거나 남용될 경우에는 국민에게 미치는 피해가 매우 치명적이고 심각하다. 공권력은 항상 냉정하고 침착하게 통제되어야 한다.’ 셋째, 경찰에는 ‘폭력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은 문제의 원인을 스스로 조성했다. 경찰에게만 책임을 물어서는 안된다.’ 넷째, 전경 자식을 둔 부모들에게는 ‘안전이 최우선이다. 무사히 복무해라’는 메시지를 주어야 했다.  


어떤 이해당사자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할 것인가에 따라 글과 말의 내용이 달라진다. 대통령은 과잉진압에 명분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경찰의 행동에 책임을 물었다. 자신이 속한 정부 권력의 편을 들기보다 농민과 시민단체의 편에서 말한 것이다. 완곡하게 말해서 다른 이해당사자를 불편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결론적으로는 한쪽 편을 드는 연설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권력자와 엘리트들의 구미에 맞는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항상 힘이 약하고 소수인 사람들의 편에 서서 말하고 글을 쓰려 했다. 강자의 비위에 맞추어 말하는 것은 영합이며 편승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그래도 실리를 챙겨야 할 때는 확실히 챙겼다. 상식이 통한다는 것, 그러니까 보편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보편성이라는 개념을 오해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것을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 보편성은 ‘완벽한 공정’과도 같은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한쪽으로 치우쳐진 편파성에 기초한다. 보편적인 감성에 호소한다는 것은 각기 다른 특수성을 편들기도 하고, 그것들 사이의 간격을 좁히면서 끊임없이 최적점을 탐색해나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보편은 고정된 명사가 아니라 움직이는 동사이다. 


따라서 글을 쓰는 원칙도 때와 장소, 읽히는 대상에 따라 항상 달라져야 한다. 한 두가지 불변의 법칙으로 고정될 수 없다. 첫머리 시작 방법이 16가지나 된다. 표현방법도 ‘단순화’부터 시작하여 ‘인상 깊은 명언’에 이르기까지 그 수가 무수하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말의 의도가 설명인지, 설득인지, 호소인지, 아니면 반박인지에 따라 발표하는 형식이 달라졌다. 담화문을 발표할 것인지, 기자회견을 통해 전달할 것인지 연설을 할 것인지, 아니면 편지 형식으로 부드럽게 전달할 것인지 달리 결정되었다. 말의 의도에 따라 문체도 달라졌다. 강건체와 우유체, 간결체와 만연체, 건조체와 화려체 중 적합한 문체를 골랐다. 


앞으로 나아갈 정책의 방향이 달라짐에 따라,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말하는 방식과 글쓰는 방식도 달라졌다. 그리고 그것이 두 대통령의 스타일이 되었다. 김 대통령 정권의 주된 관심사는 남북 화해협력과 IMF 극복이었다. 그것이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으로 드러났다. 노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권위주의 척결을 기치로 내걸었다. 대통령으로서 국민 위에 군림하는 것을 항상 경계했다. 그것은 서민적 글쓰기와 말하기로 이어졌다. 그래서인지 그는 진솔하고 투박한 표현을 좋아했다. 우리가 살면서 평소 쓰는 일상어로 우리의 삶을 파고들려 했다.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입는 것, 먹는 것, 이런 걱정 좀 안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 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 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입니다. 만일 이런 세상이 지나친 욕심이라면 적어도 살기가 힘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없는 세상입니다.”

<1988년 7월 국회 본회의>


결국 정치란 6천만 대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한 사람을 위한 정치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의 연설문을 손녀뻘 대신 비서 앞에서 낭독하고 그녀에게 소감을 물었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고문당해 피를 흘리는 한 학생의 공포에 질린 눈을 본 것이었다고 한다. 훌륭한 글 또한 실체 없는 6천만 대국민을 감동시키는 글이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다.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려고 거창하게 쓰려는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 내 글을 읽게 될 ‘당신’을 위한다면. 

씽큐베이션 <잘팔리는 글쓰기> 2회차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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