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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빛 Jul 12. 2019

"위대한 베르테르"와 "젊은 개츠비의 슬픔"

비교하며 읽는 고전 작품



 교수님이 그랬다. 자신은 소설을 당시 사회상을 읽어내기 위한 하나의 도큐먼트로 대한다고. 이는 문학작품감상의 한 갈래로, <베르테르의 슬픔>과 <위대한 개츠비>를 병치해서 읽고,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해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1. 공통점


 사랑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감정이다. 그렇기에 베르테르의 사랑과 개츠비의 사랑이 비슷한 구조를 갖고 소설에서 구현되는 것이리라.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경우, ‘베르테르-알베르트-로테’라는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전된다. <위대한 개츠비>도 ‘개츠비-톰-데이지’라는 비슷한 구도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우: 알베르트/ 좌: 톰

 삼각형의 한 꼭짓점을 차지하며, 주인공의 연적으로 등장하는 ‘알베르트-톰’은 주인공과 대조되는 특징을 지닌 인물이다. 알베르트는 차분하고 침착한 성격인 반면, 베르테르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톰은 명문가에서 태어나 예일대를 졸업하였지만, 개츠비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자신의 학력을 위조한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특징 외에도, ‘알베르트-톰’은 시대의 주류적인 가치를 내면화한 인물이다. 알베르트는 당시의 합리주의와 계몽주의를 대변한다. 자살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는 그의 입장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는 법과 형식을 중요시한다. 이는 법칙을 준수하고 수학적 이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두는 독일 계몽주의의 연장에 있다.


 톰은 당시 미국의 물질만능주의를 대변한다. 육체의 강인한 모습이 작품 초반에 묘사 되는데, 이것은 그가 정신적인 가치나 기준보다 물질과 육신을 중시하는 세속적인 인물임을 암시한다. 이어지는 불륜행각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톰은 데이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며 하나의 소유물로 생각한다. 이는 사랑이나 정신적 가치보다 쾌락, 권력, 돈을 우선시하는 현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우: 베르테르/ 좌: 개츠비

 ‘베르테르-개츠비’로 이루어지는 또 하나의 축은 이야기의 주인공들로서 작가 본인들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괴테는 샤로테 부프에 대한 자신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베르테르의 모습에 담아내었다. 피츠제럴드는 돈이 없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고통을 개츠비를 통해 말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피츠제럴드는 옛 연인의 아버지에게 “가난한 소년들은 부잣집 소녀들과 절대 결혼할 생각을 해선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베르테르-개츠비’는 자연스럽게 작가가 긍정하는 가치를 투영하는 인물이 된다.


 ‘베르테르’의 경우, 그가 대변하는 긍정적 가치는 감성과 열정일 것이다. 그는 이성보다는 정열적인 사랑과 순수한 열정이 더욱 소중하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괴테가 이끌었던 ‘낭만주의’ 사조를 집약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개츠비’의 경우, 데이지에 대한 그의 순수한 사랑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더 나아가,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부를 쌓아올린 개츠비의 모습에는 초기 이민자들이 가졌던 아메리칸 드림이 반영되어있다. 개츠비의 책 맨 뒤에 있는 계획표는 미국의 국부 벤자민 프랭클린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는 수첩을 스케줄 관리노트로 만든 최초의 사람이다.


 이러한 ‘베르테르-개츠비’의 가치는 시대와 갈등하고, 화해하지 못한다. 이는 소설 속에서 연적(알베르트-톰)과의 갈등으로 표현되지만, 그 이면에 있는 주류적 가치와 그것과 대립하는 가치가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본질이다.  (감성 대 이성의 충돌/순수와 물질의 충돌)

좌: 로테/ 우: 데이지

 ‘로테-데이지’로 이루어진 삼각형의 마지막 축은 남편과 주인공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들은 대체로 관습적인 가치를 보존함으로서 안정과 질서에 머물려고 하지만, 그와 대립되는 가치가 기존의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너무나 매혹적으로 다가와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이때 남성주인공들은 여성에게 자신이 대변하는 가치를 호소한다. 누구의 편을 들것이냐고 묻는다. 적어도 주인공에게 있어서, 여성은 ‘선택의 주체’가 되며, ‘가치의 재판관’과 같은 위치로 격상된다. 주인공들은 여성이 가치를 받아들여주면 승리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 그들은 패배자가 된다. 두 작품의 여성들은 주인공들의 새로운 가치를 거부함으로서 기존의 질서로 회귀한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남편이 곁에 있다는 사실은, 그녀의 마음에 새로운 인상을 주었습니다. 남편의 고귀한 마음, 애정, 친절한 태도를 생각하자 그녀의 마음도 한결 가라앉았습니다.”
 “이제 그만! 우리 둘만 있게 되더라도 난 톰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그건 사실이 아니니까요.”  


 이 과정에서 두 여주인공(로테와 데이지)은 주인공을 배반하며, 주인공의 죽음에 간접적으로 기여한다. 주인공이 죽음에 처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저항하지 않고 상황을 묵인하거나(로테) 주인공이 곤경에 빠진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데도 모른 체 하는 것이다.(데이지) 실의에 빠진 베르테르가 여행을 빙자하여 알베르트에게 호신용 권총을 빌릴 때, 로테는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리라는 것을 예감한다. 그러나 남편이 의심할 것을 두려워해 자신의 손으로 그 총을 건네준다. 개츠비는 데이지의 잘못을 스스로 뒤집어쓰고 그로 인해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데이지는 개츠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장례식에 찾아오기는커녕 화환 하나 보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두 소설은 비극적으로 끝난다. 이렇게 극단적으로까지 치닫는 까닭은 주인공이 시대와 갈등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모습은 시대와 조화하지 못하는 작가의 모습이 담겨있다. 사랑을 쟁취한다는 것은 명목적인 것이다. 자신의 가치가 시대와 조화를 이루느냐 못 이루느냐가 달려있기 때문에 극은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좌: 괴테 / 우: 피츠제럴드

 두 작품이 구조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갖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괴테의 독일과 피츠제럴드의 미국이 상당히 유사했기 때문이다. 두 작가 모두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 옮겨가는 과도기의 시대를 살았다. 괴테의 독일은 귀족중심에서 시민계층으로 권력축이 이동하고 있었다. 이웃나라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났지만, 독일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낙후된 상태였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고 새로운 창조는 과거의 가치에 얽매이고 있었다. 이성만을 중요시여기는 그리스문화는 과거의 유물이었고 혁명의 소산인 루소의 자연주의 철학이 태동하고 있었다.


 피츠제럴드는 어떤가. 그가 살던 시대를 ‘로스트제너레이션’이라고 한다. 1차 대전이라는 충격을 경험한 미국은 청교도적인 경건함이 무너지면서 그 자리를 지탱해 줄 도덕이 부재한 상황에서 혼란과 무질서를 경험한다. 미국이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의 막을 열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기에 피츠제럴드가 살았던 시대는 미국의 과도기였다.


 따라서 괴테와 피츠제럴드 둘 모두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새로운 질서와 가치를 제안했다는 점에서 ‘시대의 사랑을 받는 대문호’가 되었다. 만약 두 작품이 단순히 사랑 이야기만 한 것이라면, 불멸의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두 작가는 새로 밝힌 횃불을 다음 세대에 전하며 새 시대의 신호탄을 쏘았다. 보편적인 사랑의 언어를 빌려서.    


2. 차이점


 <베르테르~>와 <개츠비>의 공통점은 두 시대의 공통점을 말해주지만, 두 작품의 차이점은 두 시대의 차이점을 말해준다. 두 작품에서 드러나는 가장 중요한 차이는 ‘신의 존재/부재’ 여부이다.

 <베르테르>에서는 신의 존재가 너무 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베르테르가 로테를 연모하는 감정은 기독교 도덕의 틀에서 봤을 때 “구원 받지 못하는 것”이며 명백한 죄이다. 베르테르는 마태복음을 인용하며 말한다.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또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그래도 당신은 이 아들을 쫓아내시렵니까?” 베르테르가 느끼는 고통의 원인은 로테에 대한 사랑이 불가역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신에 의해 단죄 받아 마땅한 것이라는 데에 있다. 기독교 질서가 확고한 그 시대에 베르테르의 사랑은 공동체가 용인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서는 죄가 될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남편의 팔에서 내 팔 속으로 빼앗아온다는 것이 말입니다. 죄라구요? 좋습니다. 나는 그 죄의 천국 같은 기쁨을 남김없이 맛보는 동시에 생명의 그윽한 향기와 힘을 내 가슴속 가득히 들이마셨습니다.”p.200

 반면에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신의 존재가 없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소설 속 등장하는 ‘에클버그 의사의 두 눈’은 신은 신이되 더 이상 신으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허울뿐인 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에클버그의 의사의 두 눈은 마치 신처럼 재의 골짜기를 굽어보고 있으나,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각성시키거나 교훈을 주는 존재는 아니다. 1차 대전 이후 사람들은 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게 되었다. 신이 있다면 그렇게 큰

전쟁을 왜 막지 못했나 하는 의구심의 그 중심에 있었고 신에 대한 신뢰가 깨져 버리게 되었다. 신은 우리를 버렸다. 우리 또한 신을 버렸다. 그렇게 신은 버려졌고 그 자리를 상업주의를 상징하는 광고판이 대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쾌락을 위해서라면 불륜을 벌이고도 자책감을 느끼지 않고,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 서슴치 않는다.


 사람들이 장례식의 중요성을 경시하며, 개츠비의 장례식에 아무도 참석하지 않는 것도 기독교적 가치관의 부재를 의미한다. 죽음과 사후세계는 종교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기에, 사후세계로 넘어가는 제의적 절차인 장례식은 기독교 전통에서 중요하게 다뤄졌다. 그러나 장례식에 아무도 참석하지 않은 것은 기독교가 현대인의 정신에서 그만큼 적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위관직자(법무관)의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추모객이 이어졌으며 “슬픔을 못 이겨 (시체의) 손과 입술에 키스를 한” 베르테르의 장례식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이러한 차이점 때문에, 베르테르와 개츠비는 주로 갈등하는 대상이 상반된다. 베르테르의 경우 도덕이나 관습에 억메인 사회와 갈등하지만, 개츠비의 경우 관습과 도덕이 무너져버린 사회와 갈등한다. 갈등한다는 것 자체는 공통되나, 갈등하는 가치는 양극단에 있다. 둘은 거울쌍이다.


 결국 괴테의 시대와 피츠제럴드가 사는 사회는 같으면서도 달랐다. 사회는 시대를 뛰어넘어 보편성을 공유하며 일정한 법칙 속에서 반복되기도 한다. 그러나 특수한 맥락 속에 위치하기도 한다. 결국 소설은 그 소설이 담고 있는 사회의 보편적인 성격과 특수한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좋은 단서가 아닐까. 괴테와 피츠제럴드는 시대와 갈등하면서도 시대에 호소했다. 하나의 도큐먼트로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이들 작가들을 읽는 독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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