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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빛 Jul 14. 2019

의붓가족은 위험하다?

<신데렐라의 진실> 을 읽고

‘남자는 늑대다’라는 말이 있다.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의 성적욕망이 강하다는 것을 완곡하고 추상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남자가 여성보다 성욕이 강하다는 것은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타당하다. 따라서 남자가 늑대라는 말은 틀린 것이 아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옛날 옛적부터 그런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고 이런 말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렇듯, 대부분의 과학 분야가 대중적인 통념을 반박하려 하는 것과 달리 진화심리학은 대중적인 통념을 입증하려고 한다. ‘다윈의 대답’ 시리즈 중 하나인 <신데렐라의 진실> 또한 통속적으로 알려진 ‘표독스러운 의붓어머니’가 단순히 만들어진 이미지나 상상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과학적 “진실”이라고 말한다.    

책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라는 시집이 떠오를 것이다. 진화심리학을 논하는데 갑자기 왠 시집 제목이냐며 이해가 잘 안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정말이지 어지러우니, 한번 들어보시라.        


1.관찰


의붓자식을 학대하는 이야기는 민담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메뉴이다가장 대표적으로 알려진 이야기가 신데렐라이다. 이 이야기는 약간만 내용을 달리해서 세계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우리나라의 콩쥐, 일본의 베니자라, 인도의 무리몽이나 타니안같이 의붓어머니의 학대에 심한 고생을 했던 아이들 목록은 아주 길다.     

이러한 이야기는 동물의 행동양식과도 상당히 유사하다. 동물의 무리에서 핏줄로 묶이지 않은 가족 구성원은 가혹한 대우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책에서 예로 들고 있는 것처럼, 사자의 경우에는 여자형제와 사촌, 어머니와 딸, 이모와 조카처럼 가까운 친족들이 집단을 이루어 산다. 혈연관계가 불분명한 수컷 두세 마리, 혹은 서너마리가 암컷들의 무리에 들어가 통치를 하는데 통치 기간은 기껏해야 몇 년 정도이다. 통치하는 수컷들이 바뀔 때, 새로이 등장한 젊은 수컷들은 이전에 있던 수컷의 새끼들을 차례로 찾아내 죽인다. 이런 행동은 암수의 역할이 바뀌지만 열대에 사는 새, 자사나의 경우도 똑같으며 다른 종들에서도 폭넓게 관찰된다.     

이전에 있던 수컷의 새끼를 죽이는 젊은 수컷 사자

진화론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행동이 널리 퍼져있는 이유는 이런 행동을 하는 녀석들이 이런 행동을 하지 않는 녀석들보다 훨씬 빨리 번식하기 때문이다. 이런 행동을 하는 녀석들이 많이 살아남고, 따라서 이런 행동이 일반적인 행동으로 자리 잡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종들도 자연에서 많이 관찰되지만 그것은 환경적 요인으로 원래의 성향이 억제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2.주장(가설)


신데렐라 이야기가 전 세계 곳곳에 퍼져있다는 것은 이 이야기가 인간의 본성을 반영하는 원형이야기임을 말해준다. 자연선택을 통해 형성된 인간의 본성은 핏줄을 선호하게 되었다. 따라서 피로 엮이지 않은 의붓부모가 의붓자식과 친자식을 차별하는 것도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것이 못나도 내 자식을 두둔할 수밖에 없는 엄마의 숙명 뒤에 숨은 진실이다. 누구나 그런 상황에 놓이면 신데렐라의 계모처럼 못되게 구는 것이 자연스럽다. 


동물들이 비슷하게 보이는 행동들도 이러한 본성을 설명해준다. 다소 과감한 주장이기는 하지만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동물과 별 차이가 없다. 물론, 동물의 경우를 사람의 경우에 단순히 대입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여러 가지 아동학대에 대한 통계를 이용해서 의붓관계에서 폭력이 쉬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3.증명

우선 빈곤 문제와 같은 다른 요소들의 개입을 배제하기 위해서 목숨을 잃을 정도로 심각한 아동학대의 경우만을 세어보았을 때, 의붓어머니나 의붓아버지와 살았던 아이들의 경우가 그렇지 않았던 경우보다 치명적인 아동학대를 받은 경우가 100배나 많았다. 그리고 그 비율에 편차는 있었지만 캐나다, 영국, 호주 등의 지역으로 연구 범위를 넓혀보아도 그 결과는 비슷했다. 폴란드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연구는 전근대 사회에서도 의붓어머니나 의붓아버지와 함께 살던 아이들의 사망률이 훨씬 더 높았다는 것을 보여주어 이것이 현대적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지금도 수렵 채취로 생활하는 파라과이의 한 부족의 경우에도 의붓어머니나 의붓아버지와 사는 아이들의 사망률이 그렇지 않았던 아이들의 경우보다 두 배 가량 높았다. 


4.이론

이러한 현상은 당연하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종이 아닌) 개체의 유전자를 효율적으로 번식시키기 위하여 자손을 낳는다. 후대의 유전자를 위해 이 자손을 잘 키우는 게 관건인데, 그럴 때마다 양육 투자의 문제에 맞닥뜨린다. 자원은 한정되어있다. 그렇기에 부모는 자신들의 투자를 현존하는 자식들 사이에서, 그리고 현존하는 자식들과 잠재적인 미래의 자식들 사이에서 어떻게 가장 잘 배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이때 분명한 것은 자식이 정말로 부모 자신의 자식인지를 나타내는 단서를 고려해서 차별적으로 배분된다는 것이다. 양육 투자를 받을 후보자가 부모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는 진화적으로 신뢰할만한 지표가 있다면, 부모의 심리는 투자를 완전히 회피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기대할 수 있다. 개인은 집단을 위하지 않는 방식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5.비판


(1)이 책이 기반하고 있는 과학적 방법론(근거)에 대한 의문. (물론 모든 과학이 절대적 진리는 아니지만...) 

이 책의 주장을 과학적인 설득력을 가지는 명제라고 볼 수 있을까? 일반적인 과학은 관찰 → 가설 → 실험 → 이론(증명)으로 이루어진다. 관찰을 통해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증명하는 과정은 일반적인 과학과 일치하나, 실험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상관관계를 "검증"하는 통계와는 달리, 실험은 인과관계를 "입증"한다.) 즉 그럴싸한 설명은 되나그것이 사실인지 실험해볼 길이 없거나있다 하더라도 극도로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책의 주장을 과학적 진리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난점이 있다.     


(2)신뢰도와 관련된 의문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 책은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통계학을 끌어들였다. 그런데 통계학에도 난점이 있다. 통계학은 경험적 근거를 바탕으로 해서 논리를 이끌어낸다. 예를 들어, 여러 번의 관측(통계학적 사실)을 통해 ‘번개가 치면 곧 천둥이 울린다’라는 명제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런 귀납추론이 진리가 되려면, 관찰의 수가 충분히 많아야 한다. 그런데 충분히 많은 기준은 대체 무엇인가? 책에서 주장을 입증하기 위한 근거로 든 캐나다, 영국, 호주, 폴란드, 파라과이의 통계 자료가 충분히 많은 걸까? 세계는 넓은데 고작 다섯 개의 나라가 전 세계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까?     


또한 반례 하나만으로 논증이 통째로 오류가 될 수 있는 한계 또한 존재한다. 실제로 의붓 부모가 의붓자식과 화목하게 지내는 무수히 많은 반대사례가 존재한다. 그런 경우에 대해서는 그 밑바닥에 있는 동물로서의 본성은 같을지 모르지만, 진화적 적응환경에 맞추어 핏줄과 관련 없는 관계에도 정성을 쏟는 것이라고 한다. 결국 “의붓부모는 의붓자식을 본능적으로 미워한다.”는 주장은 “의붓부모는 대체적으로 의붓자식을 미워하나, 진화적 적응환경에 따라 다르다.”라는 주장으로 수정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수정된 가설을 입증할만한 관찰사례들을 다시 찾아야한다. 그러나 관찰 사례의 수가 서너개로 너무 적다. 물론 오류가 존재할 확률이 언제나 상존함을 감수하면서도 우리는 귀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기는 하다. 그 집단의 원소를 모두 다 조사할 필요 없이 일부만 조사하고서도 그 집단의 성질을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학이 아닌 이상 절대적 진리를 찾을수도 없고 과학자들은 개연성 있는 가설로도 만족한다. 그렇지만 같은 귀납논증의 결과물이라도 귀납적 강도가 강해짐에 따라 신뢰도가 올라간다. 귀납적 강도는 사례가 많거나 반례가 적거나 일반화가 용이할 때 강해지는데 이 가설의 경우 사례가 적고 반례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신뢰도 측면에서 처음에 이야기 했던 신데렐라 민화에서 얼마나 크게 벗어났는지 의문이다.    


실제 진화심리학에서는 신뢰도가 낮은 가설이 많았다. 알통 크기가 정치적 신념을 좌우한다는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진화심리학자들은 남성들은 상박 팔 둘레를 재기도 했다. '과학적'이라고 여겨지는 결론과 모순되는 '비과학적' 결론도 귀납법을 통해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  


물론 많은 과학이론이 귀납추론에 의존하고 있다. 보통 공리로부터의 연역에 기초한 절대적 진리는 수학에서만 요구된다. 과학은 수학이 아니다. 뉴턴의 중력이론도 많은 부분 귀납법에 의존하고 있고, 반증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니, 중요해지는 것은 신뢰도이다. 그러면 여기서 묻겠다. 이 책의 주장은 충분한 신뢰도를 갖고 있는가? 이 책의 주장이 뉴턴이론만큼이나 신뢰할만한가? 그건 아닐것이다. 이는 진화심리학이 왜 고전과학과 같은 지위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그만큼 영향력이 없는 것과 관련이 있다.  

(3)책의 이론이 현상을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모델인가에 대한 의문(본능 대 문화)

왜 민담에서는 나쁜 의붓아버지보다 나쁜 의붓어머니가 많이 등장할까? 마고 윌슨은 그 까닭을 다른 데에서 찾지만, 나쁜 의붓어머니가 많은 것은 가부장제 문화의 산물이다. 가부장제 문화는 여성에게 조숙한 여성이라는 틀을 씌우고, 여성의 성을 억압하기 위해 갖은 수를 써왔다. 재혼하는 여자가 곱게 보였을 리가 없다.     


결국 신데렐라 민화에도 본능이 아닌 문화가 개입되었지만, 마고 윌슨은 문화를 간과하고 본성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생각한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 인간의 본성은 문화와 제도를 거쳐 정반대의 방향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공동체를 위하지 않고 개체의 번식을 위하기 때문에, 혈족으로 이루어진 15명 규모를 이루며 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러나 역사가 진행됨에 따라, 인류는 혈족을 넘어서 점점 하나가 되어갔고 대규모 협력을 이루기도 했다.     


생물학적 협력본능이 부족한 인간을 하나로 묶어준 것은 신화였다. “농업혁명 덕분에 밀집된 도시와 강력한 제국이 형성될 가능성이 열리자, 사람들은 위대한 신들, 조상의 땅, 주식회사 등등의 이야기를 지어냈다. 꼭 필요한 사회적 결속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유발 하라리)” 제프리 잉햄이라는 화폐 이론가에 따르면 고대 바빌론에서는 바빌론의 수호신인 마르둑이 주기적으로 세계를 재창조한다는 믿음 아래 왕이 채무자들의 빚을 탕감하는 행사를 열었다고 한다. 이것의 진정한 목적은 부채위기로 인한 계급분열과 사회혼란을 방지하는 것이었다(<돈의 본성>). 이때 고대 바빌론 사람에게 ‘마르둑은 허구의 존재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어깨를 으쓱하고 ‘나도 알아.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며 지적의 초점이 잘못되었다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신데렐라 민담도 하나의 문화이자 신화이다. 신데렐라를 구박하고 학대하는 계모가 나중에 벌을 받는 결말은 의붓가족에 내재된 위험성이 발현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화적 장치일 수 있다.       


문화는 계속해서 혈족이라는 본성의 한계를 확장시켜나가고 있다. 마을에서 제국으로, 제국에서 세계로. 문화의 힘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예전에는 뿔뿔이 흩어져 있던 유럽 국가들이 EU로 뭉치고 있다. 문명의 진보로 세계가 하나로 묶이고 뒤섞이면서 그에 따라 가족개념도 바뀐다. 아무런 유전적 상관관계가 없는 사람들도 긴밀한 관계로 결속을 이루어낸다. 이는 책의 옮긴이가 이야기하듯이, <가족의 탄생>이라는 영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핏줄로는 하나도 얽히지 않은 가족구성원들이 행복하게 사는 이 이야기는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에서 빗겨 선 새로운 가족문화를 긍정한다. 예전에는 돌팔매질 당하겠지만, 요새는 이런 영화가 환영받는다. 문화의 힘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남자는 늑대다'라는 말도 본성의 산물이 아니라 문화의 산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남자가 여성보다 본능적으로 성욕이 많다고 여겨진 것은 제도와 관습에 의해 여자가 억압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가부장제 문화 때문에 여자가 성욕을 표현하는 것은 금기시 되었지만 남자는 그 반대였다는 것이다. 의붓부모가 의붓자식을 더 구타하며 의붓가족이 더 해체의 위험이 많다는 사실에는 이와 같이 다른 여러 요인들이 개입되 있을 수 있다. 전통적 기독교나 유교사회라는 봉건문화의 억압 때문이라거나, 빈곤 때문일 수도 있다.


현대의 사회는 더 이상 예전만큼 피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다. 이타성을 가능하게 한 것도 문화와 제도에 의해 인간이 학습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물의 세계의 관찰을 인간세계에까지 끌어들일 수 없을 것이다. 표독스런 어머니도 많지만 친절한 어머니도 많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행동에 더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문화일까? 본능일까? 문화도 본능에 의해 형성된 것은 아닐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만 현재로서는 이렇다 할 답이 없다. 이 불편한 주제에 대한 논의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정말 생각이 많아지게 하고 어지럽게 만드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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