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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빛 Jul 27. 2019

나의 한국어 해체 노트

<나의 한국어 바로쓰기 노트>리뷰-문"법"을 바라보는 세가지 관점

이소룡과 엽문을 아는가? 이소룡은 알아도 엽문은 잘 모를 것이다. 엽문은 이소룡의 스승으로 이소룡에게 무술을 전수해주었다. 그러나 나중에 이소룡은 스승과 결별하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는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는 엽문의 제자가 아닌 이소룡이 되었다.

엽문과 이소룡

   

제자가 스승을 배우는 방식은 반복되는 흉내 속에서 ‘양식’을 얻고 마침내 그 ‘양식’마저 뚫어내며 자신의 스타일에 이르는 길이다. ‘스타일’은 ‘양식’이 아니다. 어떤 철학자에 따르면, 스타일에는 일반자적 양식 속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단독자적 체취가 생생하다. 스타일은 아웃사이더의 징후로서 혐오감을 동반한다. 그러나 스타일 없이는 스승과 결별할 수도 없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리다가 자신만의 스타일을 정립하는 과정도 이와 같았다. 그는 선배 철학자 데카르트의 방법을 이용해 자신의 철학을 성립한다. 데리다는 데카르트에게 의심하는 법을 배워서 데카르트가 의심을 통해 정립했던 이성을 의심했다. 쉽게 말하면, 데리다는 데카르트와 사유의 방법을 공유했으나, 그 방법을 통해 나타난 결과는 천지차이였다.     

데카르트는 모든 현상들을 의심했고, 결국 의심 끝에 자명한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생각하고 의심하는 나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 철학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간명하게 표현되었다. 데리다 또한 그런 의심의 방법을 빌려서 자신의 철학을 개진한다. 그러나 그는 데카르트가 모든 것을 의심하는 엄청난 기획을 세워놓고서도 철저하게 추구하지 못하고 자기 시대 앞에서 멈춰 섰다고 본다. 데리다는 더 밀고 나아가, 데카르트가 옹호했던 이성의 전통도 해체하고자 한다.     


이 책(<나의 한국어 바로쓰기 노트>)을 재독하는 나의 심정이 그랬다. 밑줄을 그어가며 연습문제를 여러번 풀고 지인과 퀴즈내기를 할만큼 처음에는 감탄하고 배우면서 봤지만, 두 번째 읽을 때는 의심하며 보았다. 법을 해체했던 데리다의 철학이 어른거렸다. 그는 말했다. “해체가 정의이다.” 그러나 그는 덧붙였다. “정의는 해체되지 않는다.” 법(문법)으로 환원할 수 없는 정의(진리)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해체의 작업을 위해, ‘차연’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데리다는 기존에 우리가 쓰던 차이라는 단어와는 구별될 수 있는 용어를 필요로 했다. 바로 그 용어는 ‘차이’와 ‘연장’이 합쳐진 말이다. 언어는 차연에 의해 작동한다. (1)기표는 차이에 의해 의미를 만들고, (2)의미는 무한하게 연기된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한국인이라면 이 시를 누구나 한번쯤은 접해보았을 것이다. 여기서 ‘엄마’라는 문자 자체는 기표이고, 그 ‘엄마’라는 문자의 의미, 혹은 그 문자의 발화를 듣고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개념이 기의이다.     


(1)기표는 차이에 의해 의미를 만든다. 이 말은 텍스트들간의 차이가 의미를 만든다는 것이다. 하나의 구조를 이루는 구성 요소들은 독립된 항목들을 단순히 모은 것이 아니다. 각각의 요소는 다른 요소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며, 이들은 상호작용 한다. ‘엄마’라는 텍스트가 의미를 만들수 있는 이유는 ‘엄’과 ‘마’가 서로 다르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더 쉽게 풀어쓰면 ‘엄’은 ‘마’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엄마’라는 단어로 의미관계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더 나눠보면 ‘ㅇ’과 ‘ㅓ’와 ‘ㅁ’이 서로 다르게 생겼고 서로 다르게 소리가 나기 때문에, 이 ‘차이점’들을 조합해서 ‘엄’이라는 음소를 만드는 것이다. 똑같은 단어인 ‘부부’ 또한 마찬가지. 두 가지 ‘부’는 같은 위치에 존재하지 않는다. ‘위치의 차이’가 존재하기에 의미를 만들어 낸다. 즉, 언어는 어떤 마법의 힘이 깃든 게 아니라, 그저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의미가 만들어진다. ‘엄마’라는 단어의 의미가 만들어지는 것도 ‘누나’라는 개념과 대비되어서이다. 즉 ‘엄마’와 ‘누나’가 다르기 때문에 ‘엄마’가 ‘누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2)그러나 이 ‘차이’들은 순전히 차이나지 않는다. 그래서 데리다는 ‘차이’라는 단어에 ‘연장’이라는 단어를 결합시켜서 ‘차연’이라는 단어를 만든다. 차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고정되고 결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진행되는 과정에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데리다가 보기에 차이는 과거형이 아니라 동사의 기본형 내지 현재 진행형이다. 이 말은 차이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보자. 먹을 것이라고는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바나나가 전부인 어느 지역이 있다. 목질로 이루어진 나무나 땅바닥의 흙과는 달리 바나나는 향기롭고 단 맛이 나는 식물로, 우리가 섭취하면 분명 몸에 쉽게 흡수되어 영양소를 제공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나나는 다른 사물들과 차이가 난다. 하지만 이것이 바나나가 갖는 의미의 전부일까?    


공교롭게도 그곳을 지나던 차 한 대가 갑자기 서버렸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차가 다시 작동하기 위해서는 젤과 같은 물질이 필요한 상태라고 해보자. 때마침 바나나를 발견한 운전자는 바나나를 으깨 젤 상태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 경우 바나나의 의미는 무엇이며, 또 주변의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되는 차이는 무엇일까?       


이 세상의 어느 것도 처음부터 차이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 차이라는 것은 그때마다 어떤 상황 속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은 닐 암스트롱이 최초로 발을 디딘 지구의 위성이기도 하지만, 김소월의 눈에는 옆집에 사는 노처녀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이처럼 차이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항상 다른 것들과의 유동적인 관계에 의해 드러난다.    


이 책을 예로 들면 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책의 맨 앞 표지에는 이렇게 써있다. “한국인은 조사 은(는)과 ‘이’(가)의 의미를 구별하여 정확하게 사용하는가? 이와 같은 현재적 질문에서 시작하는 저자의 문제제기는 김소월의 <산유화> 텍스트로 하여 ‘에’와 ‘에서’의 차이를 분석한다.” 차이(특히 뒤에 설명할 이항대립)을 통해 문법을 규정하는 이 구절이 책의 핵심이다.    

‘은(는)’은 ‘이(가)’와의 차이를 통해서 의미가 규정된다. ‘주어’는 ‘주제어’와의 대비를 통해서 의미가 규정된다. 행동의 주체를 알리기 위해서 쓰는 것이 주어라면 설명의 대상을 명확히 알리는 것이 주제어이다. 한국어에는 행동의 주체를 알리기보다는 설명의 대상을 중요하게 여기는 문장구조가 매우 많다. 주격조사 ‘이’가 행위의 주체를 나타내는 주어에 붙는다면 설명의 대상이 되는 주제어에는 보조사 ‘은’이 붙는다. 그리고 ‘은’은 ‘이’와 구별된다.      


그러나 설명의 대상이 되는 주제어에 붙는다는 것이 정말 ‘은’을 ‘이’와 구별 짓는 절대적인 차이일까? 실제 서점에 나온 책을 뒤적여보거나, 인터넷상의 글들을 뒤적여 보면 알겠지만 항상 ‘은’이 주제어에 붙거나 ‘이’가 주어에 붙는 것은 아니다. 또한 앞으로 나올 책들에서 ‘은’이 항상 주제어에 붙거나 ‘이’가 주어에 붙을 것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게다가 ‘은’이 주제어에 붙거나 ‘이’가 주어에 붙는 것이 결코 뒤바뀌지 않을 절대적인 문법체계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결론적으로 ‘은’이 ‘주제어에 붙는 것’은 동일하지 않으며, 더군다나 ‘주제어’라는 요소가 ‘은’을 ‘이’와 구별하는 요소일 수도 없다. 분명 책에 나온 용례들과는 또 다른 용법으로 쓰일 때는 ‘주제어에 붙는다’는 그 본래 의미를 잃게 될 경우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에’와 ‘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작가는 ‘에서’에 적극적인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서울에서 산다', '미국에서 산다'와 같이 '에서'를 붙이는 것은 주체가 장소를 선택하는 능력이 있으며 그 장소에서 끊임없이 활동하는 것을 나타내는 적극적인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작가는 예를 든다. “대중 가요 <서울의 찬가>에서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는 이런 점에서 주어의 의지를 잘 살린 가사임이 분명하다.” 반면에 ‘에’는 소극적인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고 말한다. '서울에 산다', '미국에 산다'처럼 '에'를 쓰는 것은 산다는 의미를 정적으로나 소극적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에서’는 ‘에’와의 차이(대비, 또는 뒤에서 설명할 이항대립)을 통해 의미가 규정된다.    


그러나 몇 가지 노래가사나 작가의 규정에 부합하는 몇가지 사례에 근거했을지는 몰라도, 사실 언중이 ‘에’와 ‘에서’를 위와 같은 뜻에서 쓴다는 것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실 (객관적이기보다는) 자의적인 것에 가까운 ‘에’와 ‘에서’의 의미규정이 항상 변하지 않고 하나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위에서 보았던 ‘은’과 ‘이’의 의미가 힝싱 변하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논리에 의해 똑같이 반박될 수 있다.(추가부분)


(텍스트를 현실로까지 확장시켜서) 우리 자신을 생각해봐도 마찬가지다. 나는 다른 사람과 어떤 면에서 구별될 수 있을까? 다른 사람과 나와의 차이는 이미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매번 자신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차이란 이미 만들어져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차이를 이미 결정된 것이 아니라 진행 중인 것으로 봤다.     

‘차이’와 ‘연장’이 결합된 ‘차연’이란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데리다는 차이란 이미 결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항상 진행 중이므로 완전한 차이 혹은 완전한 의미는 영원히 연기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따라서 차이를 통해 어떤 것의 의미를 결정한다는 것은 항상 진행 중이므로 완결된 의미는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차이에 의해 생성된 문법도 완결된 체계가 아니며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완결된 체계가 아니라 ‘시간’을 통해 변화하는 진행의 과정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일단 ‘은’이라는 기호가 주제어라는 개념과 관계를 맺게 될 때 그 관계를 절대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은’을 항상 ‘주제어’에만 쓴다고 할 수 없다. ‘에’와 ‘에서’와 같은 다른 문법 개념들도 일련의 차이에 의해 확립되면 그것은 완결된 체계를 가지는 것으로 여긴다. 이들에게 이후 기호의 변경 가능성은 없다. ‘은’ 대신 ‘이’를 쓰거나 ‘에’ 대신 ‘에서’를 쓰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못한다. 이러한 체계는 보편적인 체계로 여겨지며 시간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말하자면 하나의 위치에 동시에 두 개의 사물이 공존할 수 없듯이 하나의 기호에 다른 기호의 의미가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를 산출하며, 이 문법에 기인한 사람들을 정의의 사도로 만들어준다. 이 정의의 사도들은 기의의 연기를 은근슬쩍 거부하면서, 자신들의 기표-기의 관계를 고정시켜 진리를 만들어낸다. 정해진 문법 틀에서 벗어나는 문장을 ‘비문’이라고 재단해 버리며 이것을 지나치게 강요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비문이 쓰인 소설, 책 등을 쓰레기라고 부르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어떤 텍스트를 볼 때는 문법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 텍스트가 위치한 맥락 전체를 고려하여 그것이 독자에게 어떤 의미를 산출하는지, 사회에 어떤 의미를 산출하는지 항상 다양한 관점에서 주의 깊게 판별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경숙, 채만식, 박경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데스)노트’를 무기로 삼은 모두까기 인형이 되어버린 작가는 이 점을 잊은 듯하다. 마르크스라는 기표를 ‘공산분자’로만 해석하던 우파의 광풍은 영역(시스템)만 바꿔서 진행되고 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포켓몬...아시나요..?ㅋㅋ

‘차연’과 함께 데리다가 해체를 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경계를 탐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적인 정의만을 가지고 원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기에, 원을 직접 그려보든가 원형의 어떤 사물을 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원을 직접 그리든 혹은 머릿속으로 원의 모양을 상상하든, 반드시 원의 윤곽선을 떠올려야 한다. 말하자면 원의 모양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배경과 분리된 실제의 선이든 가상의 선이든 어떤 선을 그리거나 상상해야 한다. 여기서 아주 단순하지만 의외로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원의 테두리를 이루는 선은 원의 안쪽에 속할까, 바깥쪽에 속할까?    


이 대답이 결코 쉽지 않은 이유는 유클리드 기하학과도 관련이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선을 점들의 집합으로 정의한다. 그런데 점은 위치를 나타낼 뿐 크기는 갖지 않는다. 따라서 선도 두께 혹은 굵기 없이 길이만 가진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정의에 따르면 사실상 점이나 선은 전통적인 관점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크기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크기를 갖지 않는 선을 그리거나 상상할 수 있을까? 우리가 머릿속으로 원을 그릴 때 배경과 분리된 원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어떠한 경계 혹은 테두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바로 이 경계가 원의 테두리를 이루는 선이 될 텐데 이 경계선은 원의 안쪽이나 바깥쪽 어느 곳에 속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더욱이 유클리드 기하학을 염두에 둔다면 과연 원의 테두리는 존재하는 것인가 혹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경계선이 경계의 안쪽에 속하는지 바깥쪽에 속하는지 애매하다는 사실은 실생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운동 종목에 따라 선은 안으로도 바깥으로도 규정된다. 야구 경기에서 타자가 친 공이 1루로 향하는 선과 거의 평행으로 날아갔다. 수비수는 공이 선 바깥으로 나가 파울이 되리라 예상하고 공을 잡으려고 힘껏 몸을 날리지 않았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진 공은 끝내 선을 걸친 채 멈췄다. 이 경우 야구의 규칙에 따라 공은 살아 있는 것으로, 바으로 나가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농구의 경우는 이와 반대다. 현란한 드리블로 공을 몰고 가던 선수가 살짝 금을 밟았다. 물론 그의 발은 선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고 선 안쪽에 걸쳐 있는 상태다. 하지만 금을 밟은 것을 목격한 심판은 곧장 호루라기를 불어 아웃을 선어하고 공격권을 상대에게 넘긴다. 야구에서는 선을 경기장의 안쪽으로 간주하는 반면, 농구에서는 선을 바깥쪽으로 간주한다. 이렇듯 테두리 선은 그 자체로 안쪽도 바깥쪽도 아니며, 관습에 따라 안쪽으로도 혹은 바깥쪽으로도 간주될 수 있다. 말 그대로 그것은 경계일 뿐이다. 이러한 경계는 안쪽에도 바깥쪽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실체가 있다고 할 수 없다. 마치 유클리드 기하학에서의 점이나 선처럼.    


그런데 여기서 생각을 좀 더 발전시켜 보자. 만약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 자체가 명확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안과 밖이라는 구분도 명확한 것일 수 있을까?    


논리적인 비약처럼 보이는 이 황당한 질문이 바로 데리다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해체주의라고 일컫는 것들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상술했듯, 텍스트의 의미를 전통적으로 텍스트 내부로 간주된 글 자체에서만 찾지 않는다. 그 텍스트가 다양한 상황과 맥락 속에서 산출하는 의미가 다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픽션과 논픽션을 무 자르듯이 나눌 수도 없다. 문법도 마찬가지이다. 이 <한국어 바로쓰기 (데스)노트>에 나오지 않지만, 언중에서 쓰이는 많은 말들은 한국어가 아닌가? 오히려 그 말들이 더 많이 쓰인다. 사실 책에서도 작가 스스로가 말했듯이 높임법 규정은 현실에서 잘 쓰이지 않고, 인터넷이 현실에 많은 영향을 끼치면서 신조어들이 많이 쓰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책에 대해 좀 더 말하자면, 저자는 '에'와 '에서'를 객관적 근거에 기반하지도 않고 이분법적으로 나눠버린 뒤 '에서'에 적극성과 능동성을 부여하고 '에'에 수동성을 부여해버렸다. 그리고 '에'를 많이 쓴 문인들이 타성에 젖어있다고 비난한 작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이 책이 17년 전에 나와 개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주목하자.   

데스노트..아시나요..?ㅋㅋ(마지막 그림은 오히려 해체 이후 권위의 부재가 초래할 상황의 난점이 아닐지..)

결국 이러한 경계로 나누어진 이항대립이 한낱 허구에 기반하여 작동한다는 것을 밝힌 것을 ‘해체’라고 부른다. 상술했듯, “해체는 정의이며, 정의는 해체될 수 없다.” 데리다는 해체를 통해 문법과 비문법이라는 이항대립 속에 이데올로기가 작동되고 있으며, 이항대립이 결코 ‘자연적 상태’가 아니며 인위적 산물임을 드러내려고 했다. 역사적으로 언어에서 표준을 정할 때는 근대적인 중앙집권국가가 출현할 때와 맞물려 떨어진다. 영국에서는 산업혁명 때 영어의 표준을 정했으며,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혁명 당시 통일주의자들에 의해서 문법체계가 정비되고 표준화된 언어가 나타났다.    


결국 문법도 법의 일종이며 그 속성에서 많은 점이 공통되기 때문에, 문법은 법으로 확장시켜서 생각할 수 있다. 데리다가 하고자 했던 것은 법 또한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위적인 산물이며 정의(옳음과 그름)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법과 정의는 다르다. 법은 완성된 게 아니라는 유일한 진리를 구축한다. 법은 정당해서가 아니라 법이기 때문에 신용을 얻으면서 존속된다는 것이다. 법 자체가 신성한 게 아니라, 이해관계 속에서 짜인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영원하지 않다.    

여기에 '문법/비문법', '은(는)/이(가)', '주제어/주어', '에/에서', '능동성/수동성'과 같은 다양한 이항대립이 추가될 수 있다.

이러한 해체의 결과는 모든 이항대립의 파괴를 통한 ‘포스트모던 상대주의’를 부르며 혼돈 상태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존중과 관용의 명목으로 모든 것이 허용되는 ‘포스트모던한 상대주의’를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법과 정의에는 폭력이 어느정도 개입된다고 보았다. 새로운 법을 정초하려는 시도는 폭력에 근거할 수 밖에 없고 법을 존속하려는 노력도 폭력에 기반한다고 보았다. 낡은 이항대립의 폐기 가능성, 혁신가능성, 불합리함 또는 허구성을 탐색한 것이지 이항대립의 필요성마저 부정한 것도 아니었다.     


이와 반대로 ‘가장 성공한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로 여겨지지 않는다’라는 명제에 부합하는 정의의 사도들도 있다. 이들은 마치 법이 원래 거기 있었던 것 또는 영원할 것처럼 묘사한다. 무서운 것은 본능 또는 원초적 자연 상태와 연관 짓는 것이다.(“언어란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가장 본질적인 것이고, 한국어는 바로 우리를 가장 인간답게 길러주는 어머니의 언어이다.” 본문 P13)    


해체론이 밝혀낸 사실, 세상에 진리는 없다는 것을 거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혼돈으로 돌아가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법을 무너뜨린 자리에 어떠한 형태로든 의지와 정의를 세워야 한다. 그러면 옳고 그름의 경계는 어떻게 나눠야 하나? 여기에 대해 세 가지 관점이 있다.    


1. 계약이 가장 신성하며, 계약 안에 정의가 살아 숨 쉰다. 정의는 법을 이행할 때, 계약을 실행할 때 실현된다. 합법적으로 맺어진 계약은 개입되거나, 금지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반드시 실행되어야 하며, 이를 성실히 이행하는 것이 곧 정의이다. 여기에서 계약 내용의 선이나 미덕은 논의되어 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자발적 동의와 그것에 따르는 의무이다. 무언가 기시감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 바로 <한국어 바로쓰기 노트>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별로 나아지거나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런데, 이것 자체가 옳다고 보는 생각을 갖는 사람도 있다. 왜냐면 지금 현상은 최적이고 더 나은 대안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문제는 국립국어원에서 정한 합당한 법칙이나 계약 외의 다른 것들, 언중을 배제한다는 문제가 있다.    


2. 이에 대항해서 언중의 미덕을 반영하자는 관점이다. 어떠한 말이나 문법이 가치가 있다면 공동체가 합의할 수 있는 선에서 문법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은어나 조어가 있다면, 그것을 적극 반영한다. 기준은 어디에 있냐고? 자신에게 또는 자신이 속한 집단에 있다. 방언을 쓸지 말지는 자신(개인 스스로)이 결정한다. 계약의 신성성보다는 자기지배 이상을 선호한다. 규칙을 자신이 정하고, 여기에 순응하는 칸트적인 방식이다.    


3. 공동체의 미덕을 중시하지 않는다. ‘미덕’도 결국 머릿수 많은 공동체의 법칙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허울 좋은 핑계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 하에서 유대인 혐오 표현도 당시에는 언어의 미덕이었다. 이 관점에서는 현재의 언어가 강자의 입장에서, 강자의 담론에 의해 만들어지고 강요된다. 예를 들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시민들이 모여 있는 ‘서울의 방언’이 표준어가 된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언어의 해방’이다. 이때의 해방은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방언뿐만 아니라 지방방언들이 서울말과 동등한 위치를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기득권의 논리에 따라 멋대로 나누는 ‘한국어 바로쓰기 노트’는 제거 대상이다. 이들은 책의 작가가 속한 국립국어원의 귀족(학자)집단이 언중의 언어사용양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국립국어원은 “짜장면”이 옳은지 ‘자장면’이 옳은지나 따지면서 너무 많은 시간을 축내고 있다. ‘자장면’을 올바른 한국어라고 판정한 국립국어원의 결정도 이들이 보기에는 한심하다.     


이러한 생각은 저항과 어쩔 수 없이 연관될 수밖에 없다. 언어는 어떤 이해집단이나 정치세력이 결정하는 것이지 미덕 따위를 고민한다고 아름다운 언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수자들의 언어, 지방 방언, 은어, 청소년 언어, 디지털의 도입으로 생긴 인터넷의 언어를 적극 도입하고 존중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옳다.    


문법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법으로까지 확장했다. 결국 텍스트는 단순한 글자를 넘어, 의미 관계를 만들어내는 세상 모든 것을 가리킨다. 사람도 텍스트이고, 현상도 텍스트이고, 국가도 텍스트이다. 책은 세계를 담고 있다. 말에 대한 생각이 정치에 대한 생각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작가도 글은 그 사람의 생각을 담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글에 대한 생각은 자신이 쓰는 글을 결정한다. 그리고 그것이 태도가 된다. 그 태도가 인생을 만든다. 가장 유일한 진리인 듯하다.    

(문법 또는 법의)해체는 회의와 탐색의 과정이지, 무조건적으로 무질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선과 악을 구분하는 이론의 기본 원리에 대해서, 나아가 그 이론에 따라 구분 짓는 힘들이 실생활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알아봤다. 이 긴 글의 끝에서 우리가 얻을 결론은 결국 하나다. 무한한 가능성의 평면 위에서, 거대한 언어체계는 법도 문법도 아닌, 스승(한때의 스승이었던 <나의 한국어 바로쓰기 노트>)에 의해서도 아닌 작은 개인에 의해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당신이 중요한 이유이다.    

독서모임에서 제안했던 생각거리


1. 스타일은 어떻게 확립되는가?(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 작품사례)

2.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아간다고 하는 우리는 어떤 새로운 가치를 정립해야 할까?

3.불필요하게 여겨지는 문법요소가 있다면? or 언중의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문'법' 요소가 있다면 이것을 어떤 식으로 대하는 것이 맞다고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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