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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빛 Jan 01. 2020

<더블린 사람들>, 아일랜드를 그리다

제임스 조이스의 <두 건달들>

 <셜록 홈즈> 시리즈를 쓴 아서 코난 도일과 동시대를 살아간 인물이 있다. 바로 제임스 조이스이다. 아서 코난 도일이 최전성기를 누리던 강대국 영국에서 태어났다면, 제임스 조이스는 그러한 영국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두 사람은 제국주의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고, 그들이 그려내는 인물군상들은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마치 두 사람은 제국의 시대라는 거대한 산맥을 두 반대방향에서 오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한명은 정복자의 관점에서 영국 젠틀맨의 전형을 그려내었다면, 다른 한명은 억압받는 민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 사람들>에서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는 조국 아일랜드의 암울한 현실을 다루려고 했다. 제임스 조이스는 이를 두고 아일랜드의 마비된 현실이라고 했다. 그는 이러한 조국의 현실을 다루기 위해서 아일랜드의 인간 군상들을 묘사한 단편들을 쓰는데, 이 작품들은 하나 같이 “마비”라는 주제로 일관된 지향점을 갖는다. 그래서 이러한 단편들은 개별적으로 따로 떼어놓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아일랜드인들의 마비’라는 주제를 갖는 다른 단편들과의 상호연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제임스 조이스가 작품을 쓰게 된 시대적인 상황과 역사적인 맥락 또한 함께 고려해서 이 작품을 읽어야 할 것이다.  

   

 8세기 초만 해도 베네치아와 견줄 수 있을만큼 명물 도시로 자리매김했던 더블린은 연방법의 적용을 받아 그 위치가 축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유무역과 영국의 약탈적 통치로 인해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이것은 <두 건달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방황가 맞물려서, 작품과 시대와 개인을 연결시킨다. 그가 말하고 있는 더블린의 마비란 무엇인가. 궁핍과 불공정한 사회 속에서 타락하고 무능한 사람들의 마비된 양심, 마비된 진실, 마비된 존엄성, 결국은 마비된 아일랜드 정신이기도 하다.     


 <두 건달들>은 이러한 전체 작품의 한복판에 위치한 단편이다. 그렇기에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하면서도 당시 아일랜드 현실의 핵심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별 다른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작품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두 한량이 만나서 거리를 걷는다. 한 한량은 코얼리라고 하는 이름의 사내이고, 나머지 한 청년은 레너헌이라고 하는 인물의 사내이다. 코얼리는 레너헌에게 자신이 유혹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코얼리는 여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섹스를 위한 도구 또는 돈이 나오는 돈줄 정도로 생각한다. 코얼리는 이전에도 많은 여성들을 유혹하고 버린 경력이 있는 인물이다. 과거의 한 여성은 그에게 마음을 주었으나 이 둘은 제대로 된 관계로 발전하지 못하고, 여성은 창녀가 되어버린 상태이다. 코얼리는 지금 자신이 유혹한 새로운 여성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레너헌은 이를 부러워하며, 코얼리를 닮고 싶어한다. 그는 스스로를 코얼리의 제자라고 여기며, 그에게서 한 수 배우고 싶어한다.    


 <두 건달>들은 아일랜드 청년들의 군상을 묘사한 작품이다. 이들의 경제적인 형편은 넉넉하지 않아 보인다. 코얼리는 현재 실업자이다. 자신이 만나는 여성에게 스스로의 이름도 밝히지 못할 정도로 그의 처지는 변변치 못하다. 다만 코얼리는 자신이 그럴듯한 자질을 가진 것처럼 꾸며낼 줄만 알고 있다. 레너헌도 그와 처지는 비슷하다. 그 또한 도박과 관련된 일로 먹고 살만큼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다. 아일랜드인들은 경마나 권투경기에 도박을 하는 등 비생산적인 일에 참여하면서 식민지의 경제적 종속 상황을 이어왔던 것이며, 조이스는 이러한 경제 구조에서 할 일을 찾지 못하고 떠도는 식민지인의 마비된 삶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그는 하루 종일 굶고 있는 처지이며, 이는 그가 처한 경제적인 곤궁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러한 빈곤은 청년들의 연애관에까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데, 이 둘은 연애를 돈과 재산획득에 관련된 일종의 비즈니스로 여긴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 잘 드러나 있다.     


 “그가 만일 약간의 현금을 가진 마음씨 곱고 순박한 어떤 처녀를 만날 수만 있다면 어느 아늑한 변두리에 자리를 잡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He might yet be able to settle down in some snug corner and live happily if he could only come across some good simple-minded girl with a little of the ready.")    


 두 건달들 중 하나인 코얼리는 어떤 인물인가. 코얼리는 경찰 수사관의 아들로 아버지의 체구와 걸음걸이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는 모든 일에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기를 좋아하고, 대화 시에는 주로 자기 이야기만 하면서 동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혼자 떠벌리기를 좋아하는 등 가부장적며 전형적인 남성 캐릭터이다.  하녀를 만나러 가는 그의 몸집, 느긋한 발걸음, 그리고 고압적인 장화 소리에는 ‘뭔가 정복자 같은’ 느낌이 배어있는데, 그가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할 뿐만 아니라, 아일랜드를 정복한 ‘비열한 배신자’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아버지의 직업이 경찰이라는 사실에서도 그의 실체는 분명해진다. 영국의 식민 통치는 식민지인들을 감시하고 억압하는 경찰의 도움을 필요로 했고, 특히 대기근(Great Famine) 이후 폭동이 빈발하게 되자 경찰은 제국의 절대적인 공모자로 변질된다. 전통적으로 무장을 하지 않은 영국의 경찰과는 달리 거의 군대의 수준으로 무장한 아일랜드 경찰은 사복경찰과 밀고자의 철저한 정보망을 통해서 아일랜드의 독립 투쟁을 무력하게 만드는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이들 경찰 조직에 대한 조이스의 증오는 율리시즈에서도 잘 드러난다. 따라서, 특별히 하는 일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건달 코얼리가 사복 차림의 경찰관과 열심히 뭐라고 이야기하며 걷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고 (D 51) 그가 온갖 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다 (D 51)는 것은 그가 제국의 식민 통치에 공모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이는 그가 아일랜드와 여성 모두에 대한 비열한 배신자이자 정복자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제국에 협조하면서 권력과 부를 추구하려는 이들 제국의 공모자들은 식민지인들의 혐오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는 제국의 행위를 비난하면서도 이를 동경하고 닮아가려는 식민지인의 왜곡된 심리를 말해주는 것이며, 레너헌이 코얼리의 제자 로서 그의 행위를 모방하려 함은 권력 추구를 향한 식민지인의 왜곡된 욕망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하겠다. 레너헌은 자신을 지배자의 반열에 올려놓으려고 애쓰는 식민지인의 한 전형인 것이다.    


 각기 제국적 자아와 식민지적 자아를 대변하는 이들의 차별성은 인물묘사의 차이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외면적인 면만 묘사된 코얼리와는 달리 레너헌은 복잡한 내면의식과 작위적인 외부의 모습이 함께 제시되면서 식민지인의 혼란스러운 심기를 반영한다. 코얼리의 긴 독백에 재미있게 귀를 기울이는 표정을 짓지만 그 풍부한 표정의 물결이 지나가고 나자 곧 피폐한 모습을 드러내는 (D 50) 레너헌의 이중성은 바로 단순하고 단성적일 수만은 없는 식민지인의 심리에 기인한다. 그의 이러한 속성은 하얀 고무장화 그리고 멋들어지게 걸친 우비로 젊음을 연출하려는 의도와 희끗희끗한 숱이 적은 머리와 군살이 붙은 허리가 보여주는 현실과의 간격으로 암시되면서, 두 겹의 달무리에 둘러싸인 커다랗고 희미한 달에 고정되어 있는 그의 황량하고 쓸쓸한 시선에 담긴 내면심리로 구체화된다. 넉살좋게, 약삭빠르게 등의 형용어구로 거머리 레너헌을 식민지의 한 전형적인 존재로 설정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삶의 방식이 아일랜드의 경제 상황 등 사회 구조적인 문제야 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설 속에서 여성은 이중적으로 착취되는 존재이다. 여성을 예속하는 하나의 억압은 식민지인으로서 영국에 종속되어야만 하는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식민지인 여성은 하층민으로서 그려지며, 다른 집의 하녀로 살거나 창녀로 사는 등 매우 낮은 지위를 감수해야만 했다.  이들 여성이 신분을 상승할 수 있는 방법은 결혼뿐이라 사랑이 없는 안정만을 위한 결혼만을 추구하게 된다. 또 하나의 억압은 코얼리와 같은 가부장적 남성에 의한 억압이다. 그녀는 클립으로 자신의 블라우스를 바짝 죄고 있는데, 코르셋과 같은 이러한 옷차림은 당시의 가부장적인 관념이 여성들을 얼마나 옥죄이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여성들은 당시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미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야 했고, 따라서 여성의 전체 삶 또한 자신들에게 강요된 프레임, 남성들의 시선에 부합해야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을 유의해서 본다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하프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하프는 코얼리에게 착취당하는 여성을 상징하는 동시에, 조국 아일랜드의 비극적인 현실을 의미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잘 드러나는 것이다.      


그〔하프연주가〕는 이따금씩 새 손님이 올 때마다 얼굴을 재빨리 흘끔거리며, 또 이따금씩은 지겨운 표정으로 하늘을 힐끗 올려다보며 아무렇게나 줄을 뜯었다. 그의 하프도 덮개가 무릎께까지 흘러내린 것에도 개의치 않고, 낯선 사람들의 시선이나 자기 주인의 손이 다 마찬가지로 지겨운 것 같았다. 한 손이 베이스음으로 고요히 흘러라, 모일강의 물결이여의 선율을 연주했고, 그러는 동안 다른 한 손은 각 음절마다 높은 음으로 따라붙었다. 노래의 음조가 깊고 충만하게 들렸다.    


하프는 전통적으로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악기이다. 그래서 반나신의 여성으로 의인화된 하프는 여성화된 아일랜드와 하녀를 상징하는 것이며, 하프의 여인상이 자신을 연주하는 주인이나 구경꾼 모두를 지겨워하고 있다는 것은 코얼리와 레너헌처럼 여성을 이중으로 억압하는 사회구조에 대한 반감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연주되는 토마스 무어(Thomas Moore)의 피오눌라의 노래 (Song of Fionnuala) 역시 아일랜드의 식민지적 상황을 애잔하게 전달한다. 바다의 신 리아(Lia)의 외동딸인 피오눌라는 마법의 저주로 백조의 모습으로 변해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떠돌아 다녀야만 하는 아일랜드의 전설 속의 여인이기 때문이다. 바다를 연상케 하는 푸른색 옷차림과 하얀 밀짚모자의 하녀와 바다의 신의 딸인 피오눌라가 보여주는 연관성으로 미루어볼 때, 피오눌라는 영국에게 주권을 빼앗긴 아일랜드를 상징함과 동시에 코얼리에게 성적·금전적 착취를 당하는 하녀 와 동일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것들을 염두에 둔다면, 이 작품의 주제가 영화 <기생충>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 <기생충> 또한 양극화로 인한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기택네 가족의 기이한 삶의 방식을 만들었다. 이 소설 또한 아일랜드의 식민지화라는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청년들에게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왜 그들이 기생적인 삶의 방식을 택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파고든다는 점에서 <기생충>과 주제가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기생충>에서 약자들이 연대하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듯이 <두 건달들>에서도 주인공이 자신보다 더 약자인 여성을 수탈하며 연대하지 못하는 기생의 삶을 보여준다. 현상의 단편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본다면, <기생충>과 <두 건달들>을 비교해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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