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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긍 Oct 24. 2019

시각보다 마음으로 보는 헬레나 여행기#그림에세이

-눈으로 담아내지 못해도 너무 감사한 그녀의 '세계일주?!'

“주디 덕분에 ‘안내 도우미’없이     

오늘도 정말 편하게 왔어요.     

아! 이 참에 안내 도우미 알바를 해보는 게 어때요?     

용돈도 벌고 좋을 텐데. 호홋”                    


요즘 헬레나에게 나의 한쪽 어깨를 빌려준다.     

그리고 길의 상황을 미리 일러줘야 한다.                         

그녀는 전혀 눈치 채지 못 한다.          

그런 일들이 나에겐 얼마나 힘에 벅찬지.               


-시각장애인복지관 영어 반에서.(2007~)                                        



“주디, 오늘 영어회화 연습 많이 했어요?”          

헬레나가 웃으면서 내게 묻는다.     

“몇 번 해보긴 했는데 아직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네요. 외우지도 못하는데 오늘 시키면 어쩌지?”  

                       

집을 벗어나기로 결심은 했어도 막상 어디를 가야 할지 막막했는데 최근 인터넷 검색으로 우연히 ‘실로암 시각장애인복지관’을 알게 되었다.

이 동네로 이사 온 후 집 근처와 지하철역만 다니느라 미처 알지 못한 공간. 집 근처 봉천역 앞에 이런 곳이 있다니.

그곳은 다양한 ‘학습 지원센터’와 ‘음악재활센터’, 점자 학습반과 문화탐방, 여행, 맛집 기행반 등이 개설되어있다.  일단 복지관에서 코치가 지도하는 ‘피트니스’ 반에 등록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헬레나의 추천으로 나도 영어회화 반에 가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영어강사는 밝은 성격의 미혼 여성이다.     

 "안녕하세요? 정말.. 반가워요!

영어반 강사 Sin-dy에요~"

그녀의 발음을 들어보니 해외에서 오래 거주했나 보다. 음.. 해외파? 발음 진짜 좋네!

어? 근데 그녀도 점자 타자를 쓴다?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그녀의 눈동자 빛이 흐릿한 회색이다.   

       

첫 수업은 영어로 나를 소개하는 것부터 했다.

역시 점점 더 말수가 적어진다.

아.. 난 더 이상 ‘student’도 아닌데. 어쩌지?               

 "Nice to.. meet you. i'm Ju-dy.. 아휴... 더 못하겠어.. 요.. Thank you!"     


나의 어색한 소개를 신디의 경쾌한 웃음으로 이어갔다. 그날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서 헬레나에게 얘기를 들어보니 신디는 선천적인 시각장애란다. 그녀가 10대 초에 가족들이 모두 미국으로 건너가 머물게 되었고 그곳에서 영어를 문자가 아닌 소리만으로 배우게 됐다고 했다. 미국에서 학위를 따고 현재 몇 개월 동안 한국에 머문다고.   

        

그녀의 수업은 한동안 이어졌는데

신디가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바람에 영어반이 없어졌다. 아유~ 너무 아쉽다!   

                        

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영어수업이 없어져서 허전했는데 다행히 이제 선릉역 근방의 문화센터에서 영어수업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오전에 서울대입구역에서 헬레나 일행을 만나 동행한다. 헬레나는 30대 초반부터 시각장애가 왔고 이제 혼자서는 활동이 어려워져서 몇 년 전부터는 ‘안내 도우미’의 동행이 꼭 필요하다. 평소에 그녀가 이동할 땐 50대 후반의 여성 안내 도우미와 늘 함께다.   

                  

선릉역의 분당선 방향 7번 출구로 나와 20분 정도 거슬러 걷다 보면 장애인들이 이용하는 문화센터 건물이 나온다. 그곳 4층에 시각장애인 영어 교실이 있다. 회원들은 7~10명 정도 되는데 그중 2~3명은 스케줄에 따라 빠진다. 선릉역 근처에 시각장애인 안마센터가 있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이 곳 영어반 수업을 찾는다.

그래서인지 영어회화반의 수업은 외국인을 대하는 인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천적으로 시각장애가 있는 경우 그들은 모두 점자 자판기와 점자도서를 들고 다니며 문자를 점자로 이해하고 읽기가 가능하다.

헬레나와 나처럼 후천적인 시각장애의 경우 수업을 듣는 걸로 영어를 익혀야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듣는 것만으로도 헬레나는 반에서 상위 수준이다.                    


“헬레나는 어쩜 그리도 영어를 잘해요?

영어반 활동한 지 오래됐나 봐요? 부럽다.”     

그러자 헬레나가 조용히 웃으며 말한다.     

“주디도 곧 잘하게 될 거예요. 영어반 들어온 지는 이제 3년 됐어요. 작년에 복지관에서 미국 여행도 신청해서 다녀왔고요.. 올해 목표는 서유럽이지요. 실명하기 전에 세계일주를 하는 게 저의 꿈이에요.”       


나는 그때 그녀 말이 참 의아했다.     

‘앞이 안 보이는데 낯선 해외여행을 어떻게 가지? 무섭지 않나?’  내가 다시 물었다.           

“지금 어느 정도 보여요..? 앞이 잘 보이는지도 않는데 왜 여행을 해요??” 그러자 그녀가 담담하게 대답한다.      

“내가 보는 세상은 작년이랑 오늘이랑 또 틀려요. 시야가 점점 좁아지거든요. 빠르면 3년 안에 좁아진 벽에 아무것도 담을 수 없게 된대요. 그래도 낯선 곳을 여행하는 건..     

반드시 눈으로 담아야만 하는 게 아니니까.. 이렇게 가슴으로 느끼는 거지요.”   

본인이 하는 여행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행복해하는 그녀가 잘 이해가 안 가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이쪽이에요! 어머님이시군요? 안녕하세요?!”          

서울대입구역에서 그녀와 함께 온 어머님을 만났다.          

“아이고, 정말 고마워요. 제가 함께 가야 하는데..” 내가 바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함께 받는 수업인데요. 헬레나는 저에게 맡기고 들어가세요!”            


오늘은 헬레나가 안내 도우미를 예약하지 못했다며 수업을 거른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안내 도우미를 대신하기로 했다. 오전 8시 20분. 직장인들의 출근 시간에 이동하는 건 늘 복잡하고 힘들다.       


안내 도우미는 시각장애가 있는 이들의 한 발 앞에서 다가올 길의 상태와 주변 상황들을 미리 알려야 한다. 어머님 앞에서는 자신 있게 말했지만 사실 걱정이다.

 ‘나도 제대로 못 보고 넘어지기 일쑤인데 나 땜에 헬레나가 다치면 어쩌지?!’

    

계단이 시작되면 몇 걸음 후에 시작되는지 미리 알려야하는데 내 눈으로는 계단이 언제부터 시작되는지 거리 감각이 없다. 계단안내를 알맞게 못하게 될까봐 겁이 난다. 낯선 계단을 내려가는 건 혼자일 때도 무섭지만 안내하는 건 더욱 두렵다. 휴ㅠ       


앞을 보고 미리 안내하는 일이

그리도 힘든 일인지 미처 몰랐다.

헬레나는 나보다 마른 체격인데 키가 큰 편이라 보폭을 맞추기도 쉽지 않아 함께 걷는 게 벅차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건 눈으로는 담지 못한다 해도 담아낼 감성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참 행복하다는 걸 헬레나에게서 많이 배운다.

앞으로 자신이 앞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에 대해 본인의 운명을 탓하거나 누구를 원망하지 않고 모두에게 늘 감사하는 그녀.     

이건 영어 반에서 함께 하는 다른 시각장애 화원들 역시 그렇다.                


그 날 그녀를 무사히 집까지 데려다주고 오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 잘 안 보이는 세상에 엄마에게 의지하며 어깨를 짓누르던 과거의 내 모습이 투영된다.

    

‘나보다 체구도 작은 우리 엄만

그동안 내가 얼마나 버겁고 힘들었을까?’                         



내가 웃음을 되찾게 된 건
 다시 세상을 제대로 보게 되어서가 아니다.
평범한 일상을 감사히 보는
새로운 ‘눈’이 떠지면서다!
-마음으로 보는 헬레나 여행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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