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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긍 Oct 26. 2019

#장애이해 #그림에세이 엄마의 꿈 '해피아이!?'

-80년대 아동복 '해피아이'를 아는가?

“어머머~~! 내 딸이라서 이런 말 하는 게 아니야. 너 진짜... 피아노 천재야!" 유년 시절 엄마에게 늘 듣던 말.     

그땐 엄마가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 선율을 피아노로 그대로 옮기곤 했다.  -나의 유년 시절 (1987)    


엄마는 여리여리 한 체구에 여성스러운 외모.     

'서양화'를 전공했고 패션에 관심이 많은 멋쟁이기도 하다.

지금도 어려 보이는 외모로 나랑 자매냐는 얘기도 듣는다. (딸인 나한텐 ‘막말’인 셈ㅜ;;)     


내가 태어난 시기 80년대는 ‘베이비 붐’이었다.

지금처럼 ‘저 출산’으로 인한 문제가 없이 아니,

그와는 정 반대로  아이들이 너무 많아 고민하던 시절.

학창 시절 한 반에 60명은 족히 넘었으니까.     


‘하나만 낳아 잘 키우자!’라는

슬로건까지 등장했다.     


경제성장도 활발히 이룬 화려한 80년대.

아동들이 ‘피아노’를 배우는 건 기본이었다.     

엄마의 꿈은 자신의 딸은

본인이 전공한 미술이 아닌, 악기를 다루는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다.      


그녀는 그동안 개구진 첫아들에게 너무 시달려서 여성스러운 공주님을 바라 왔다. 하지만 막상 태어난 딸은 외모부터 엄마의 희망과는 달랐다.     

지금처럼 초음파로 태아를 감지하지 못하던 시절 엄마가 나를 임신했던 80년대 이야기다.     

당시 엄마의 담당의는 단지 육안으로만 검진하고 뱃속의 나의 상태를 지레짐작으로 말한다.     


“배의 둘레로 보나 아이 형태로 보나...

음, 이건 틀림없는 쌍둥이네요. 축하합니다! 하하..”

그도 그럴 것이 뱃속의 아이는 어마어마하게 부피가 크다!

"쌍.. 쌍둥이라니, 말도 안 돼!ㅠ"     


그때 엄마와 친한 동창 정숙 이모가 쌍둥이를 출산하고 무지 고생하는 걸 곁에서 지켜보던 터라 엄마의 한숨과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뱃속의 커다란 아이는

출산 예정일을 훨씬 넘기고도 나올 생각을 않는다.

결국 다시 찾은 산부인과.

“선생님, 아이가 예정일을 2주나 넘겼어요. 어쩌지요? 휴..”그러자 담당의가 출산 촉진제를 권한다. 그렇게 입원 후 48시간을 내리 촉진제까지 맞아가며 고생 끝에 나온 아이..

허나 막상 아이를 출산해보니 예고했던 쌍둥이가 아니다?!     

그렇다고 튼실한 사내아이도 아닌...

4.2kg의 건강한 여장군이다!?     

아이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손톱과 발톱, 심지어는 머리털까지 까맣게 자라 올라왔고

토실토실하고 뽀얀 ‘돌쟁이 포스.’

주변 사람들 아무도 갓난아이라고는 믿지 않았고 담당의 마저 놀랐다고 하니.     

많이 순하던 아이는 그렇게 주는 대로 잘 먹고 잘 웃으며 성장해간다.     


그렇게 사내아이처럼

듬직하게 태어난 아이가 ..

  바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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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실로암 미술반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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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엄마의 기대 속에서

머리에는 알록달록한 삔과 방울 장식을 꼭 달아야 했다. 머리라도 그렇게 묶지 않는다면 통통한 체격으로 우량아 사내아이로 오해받기 십상이었으니...     


외출시엔 의상도 반드시

치마와 원피스만 입으며 나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던 몹시 여성스럽고 소녀답게 꾸며진다.


80년대를 주름잡던 아동의류.

추억 돋아 기억나는 명곡이 떠오른다.     


'나는요, 정말 멋쟁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꼬마신사, 꼬마 숙녀~♬'     


tv에서 방영하던

해피아이 CF에 등장하는 모델들은 대부분

어린 내가 보기에도 하나같이 인형처럼 예쁘다.


그들처럼 인형외모는 아니었지만 나도 '해피아이' 아동복을 애용했다. 그렇게 건강하게 성장한 내가 일곱 살 무렵

엄마 손에 이끌려 역시 나에게 그닥 어울리지 않던 피아노 학원을 찾게 된다.     


길동 교회 뒤에 놀이터가 있고 그 옆으로 뻗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피아노 학원이 나온다.      

그때의 피아노 학원 이름이 ‘하예나 피아노 학원'이다. 당시 태어난 학원 여원장의 딸내미 이름이 '김 하예나‘인데 그 이름을 땄다고 했다.     


여원장의 아버지는 '길동 교회'의 장로였고

가족 모두 신앙심이 돈독해서 아이 이름의 뜻도

 '하나님이 주신 예쁜 나'라는 의미의 한글 이름 '하예나'라고 했다. 그때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음감'만큼은 아주 기가 막힌 아이였다. 엄마가 흥얼거리던 콧노래를 기억해서

그 멜로디를 그대로 피아노로 옮겼으니까.

깜짝 놀란 엄마는 내가 음악 '천재'라며 피아노를 전공하라고 적극 추천했다. (어린 나에게 음대 교수가 되라고까지 앞서 간 울 엄마..:)          


사실 난 그보다 더 재미있는 게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서양화를 전공한 엄마의 피를 물려받은 게 아닌가 싶다.


피아노보다 그림 그리는 게

훨씬 더 재미있고 좋았으니까.  

   

학원에서 피아노 자리가 날 때까지 차례를 기다리게 되면 지루하다. 그래서 원장의 딸내미 ‘하예나’를

볼펜으로 그리곤 했다. 원래는 음악이론 학습용 종합장을 하예나 모습으로 채워나갔다.      

나중에 원장이 그림에 감탄하며

내가 그린 하예나를 작은 액자에 끼워 보관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피아노 원장이 내게 하던 말.


"주혜는... 아무래도 피아노보다

그림을 그려야 할 거 같아. 어머, 내가 피아노 가르치면서 할 소리가 아니네.. 오호호~"     


피아노 수업을 마치면 나를 유독 귀여워하던 원장의 여동생이 천호동에 있는 ‘유니버스 백화점’에 나를 데리고 다녔다.

백화점 정문 앞에 코끼리 형상이 있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그때 유니버스 백화점에 함께 가면 그녀가 나에게 '소라 빵'을 사줬다.     


아, 입에서 살살 녹는 달콤한 연보라색 크림.     

촉촉하고 부드러운 그날의

'소라 빵'이 참 그립다.          

옛 추억에 이리도 젖어드는 걸 보면     

나도 이제 나이를 먹나 보다.   

      

“피아노 치는 걸로 재활치료를 해보는 게 어때?

너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 잘 쳤자나~”     


오른손을 못 움직이게 되면서 피아노로 재활치료를 해보라는 주변의 권유가 있다. 특히나 우리 엄마의 적극 추천.     


‘피아노를 치는 거? 그것도 손의 재활로 괜찮겠네.

 아 맞다! 난 이제 악보를 못 보겠구나...’     


물론 악보 없이도 악기를 연주할 수는 있겠지만

답답하고 불편한 마음이 더 생길 거 같다.

오른손을 사용하려고 글씨쓰기도 해봤지만

텅텅 비어버린 머리에 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기도문을 줄줄 써 내려가는 일도

이제 재미없고 너무 지겹다.          


2008년 11월의 어느 날..

‘실로암 시각장애인복지관'의 미술반에서 무명작가(설치미술)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우리들은 작업실 구경도 하고 저마다의 작품들을 감상했다.     

사실 나의 경우엔 어두우면 더 앞이 안 보이기 때문에컴컴한 작업실 내부 환경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여러분~ 여기 주목!

작가님이 종이를 나눠 주실 거예요,

이제 자신만의 멋진 세상을 담아보세요~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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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에서 실습 (2008.11.28)


모두에게 검은 종이와 은색 테이프를 나눠준다.

견학한 곳의 작가가 지켜보는 가운데 20분 가량 우리도 작품만드는 실습을 하게 됐다.

같이 방문했던 강사 두 명을 제외하고

회원들은 전부 눈이 어두웠다.     


그래도 언제나 그랬듯

그림과 함께 할 때면 우린 반짝반짝 빛이 나고 신이 났다!     


미술반 회원은 7명이었다.

우리들 중 가장 나이 많은 '왕 언니'가 70대였고

내가 그들 중 가장 막내인 20대,

나머지 회원들은 30~50대 중년 여성들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복지관 미술반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마냥 행복했다. 복지관의 방학이 있는 여름과 겨울을 제외한 시간들을 이곳 취미 미술반에 흡수됐다. 사고 전에는 친구를 사귈 때 나이와 취향, 스타일을 중시했는데 내가 달라지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역시 ‘반장’이다.미술반 수업을 단 한 번도 빠진 적 없다. 학창 시절에 이렇게 열정을 다했다면 어쩌면 운명이 달라졌을지도.               


'위기와 기회는 한 배를 타고 온다고 하던가?'
 나에게 시각장애가 생기면서
비로소 그림을 담게 된다.


맑고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을.  

   -실로암 미술반 (2008~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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