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자대면

by 자정의 크리스마스

이상하게 무엇이든 기억에 잘 남지 않는 편이었다. 아팠던 기억도 행복했던 기억도 결국은 다 흐릿해지고 뭉툭한 감정들만 남았다. 나는 흐릿한 기억력을 방어 기제 삼아 나는 주로 숨었고 잊어 갔다. 그럼에도 잘 잊히지 않는 기억들은 대체로 슬픈 기억들이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에게 딸들이 아픈 손가락이듯 반대로 어머니가 나에게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가장 소중하지만 또 가장 마음 아픈 그런 존재. 그런 나에게 가장 어머니가 가장 작아 보이던 때는 우리가 세상에 단 둘이 남게 된 이후였다. 치열하고 절박했던 고3을 지나 그때의 나는 아픈 어머니를 뒤로한 죄책감과 대학 시절을 보내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은 어린 마음이 엎치락뒤치락 서로 커지고 작아지고 했다.

그러던 겨울날의 일이다. 그날은 한두 달쯤 되던 때였다. 21살 1월 즈음 처음 연애를 시작하게 된 후로 말이다. 어머니가 나의 첫 연애를 눈치채버리고 말았다. 눈치챈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늘 통화 중이었다. 그때 남자친구는 장거리였고 우리는 풋풋하게 사랑을 키워가고 있어서 잠깐의 통화로는 늘 아쉬웠다. 그래서 저녁에 시작한 통화는 밤이 되도록 멈추지 않았고 둘 다 까무룩 잠들어 아무도 끊지 못한 채로 아침에 누군가가 깨어나 뜨끈해진 전화기를 들어 통화 종료를 누르기 전까지 전화는 새벽 내내 우리를 연결하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아직 어머니께 어린아이였기에 집을 비우실 때는 밤에 한 번씩 전화를 하시곤 했는데 그날은 곧 내가 편하게 그에게 통화를 할 수 있는 밤이기도 했다. 그래, 결론은 통화 중이었던 거다. 어머니는 밤새 통화되지 않는 딸을 걱정했다. 나는 엄마가 잘못 걸었겠지 하고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통신사에도 전화를 해보셨다는 어머니의 말에 이실직고 고백했다. 내가 남자에 관심이 없을까 봐 여자를 좋아할까 봐 내심 고민하시던 어머니였기에 남자친구와의 연애는 어쩌면 희소식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호구조사로 으레 대학생이겠거니 하고 전공이나 학교, 사는 곳 등을 물었던 것 같다. 그러고는 했던 마지막 질문은 우리 집 사정에 대해 알고 있니였다.

당시의 우리는 오랜 밤을 지나 비로소 자유로워졌던 때였다. 오랜 시간 설득한 어머니의 이혼은 나에게 해방감을 줬지만 어머니에게 이혼은 생각보다 크고 무거운 낙인이 되어버렸다. 어린 나이의 결혼해서 인생의 절반이 넘는 결혼생활을 실패했다 마무리 짓는 것이라 여겨지신 듯했다. 이혼했다는 꼬리표가 붙어서 부끄럽다고 실패한 인생 같다고 느끼는 어머니를 다독이며 네 식구에서 이제는 단 둘이 남았지만 우리는 우리 둘이서 잘 살 수 있다고 어머니께 늘 말해주었음에도 어머니에게 그런 말은 잘 닿지 않았던 것도 같다. 늘 스스로가 당당하지 못하시다고 생각하시는 어머니를 이해하기에는 난 겨우 21살이었다.

어머니의 그 질문에 나는 그가 당연히 안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어머닌 망설이며 또 물으셨다. 그 애가 괜찮다고 했냐고. 그 말에 나는 좀 목구멍에 뜨끈한 게 울컥하고 느껴진 기억이 난다. 고작 내 첫 연애에 어머니는 왜 또 작아지는 마음을 하고 계실까. 어머니에게 조금은 과장된 어투로 당연히 괜찮지. 그런 게 뭐가 중요해 엄마. 그리고 이런 내가 싫을 애라면 나도 좋아하지 않았을 거야. 하고 말했다. 가만 듣더니 어머니가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하셨다. 첫 연애를 들킨 것도 모자라 셋이 같이 식사라니 결혼할 사이도 아닌 이 덜 여물은 연애를 어머니 없이 낱낱이 보여줘야 한다니. 그것 만은 피해야겠다는 생각에 며칠을 피해 다니다가 결국 어머니께 져버리고 말았다. 남자친구에게 그제야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어른이 만나자고 하시면 당연히 만나야 하는 거라고 그랬다. 21살 나의 눈으로는 남자친구가 그런 말을 하는 것에 참 어른 같아 보였지만 그도 어린 25살이었다.

그렇게 성사된 식사장소는 영등포 타임스퀘어에 매드포 갈릭이었다. 양식집이라고는 어릴 적 패밀리 레스토랑 가본 게 전부였던 나이였는데 50만 원짜리 월세방을 함께 살던, 그때의 어머니 주머니 사정 상 꽤 비싼 곳이었으리라. 스테이크, 파스타 같은 음식들이 앞에 놓이고 숨 막히는 삼자대면이 시작되었다. 내가 왜 이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장소에 있는 장면이 보이는 걸까, 이상하다 꿈인가 같은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무슨 말을 하실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둘의 대화를 들었던 것 같다.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리 집에 대한 이야기나 어머니가 걱정하셨던 부분에 대한 말은 없었다. 그저 딸아이의 첫 남자친구에 대한 궁금증만 잔뜩 풀어내셨던 것 같다. 가만히 앉아 듣기 부끄러운 나에 대한 칭찬들까지. 그렇게 셋의 아슬아슬한 식사가 끝나고 나서 어머니는 남자친구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고 전폭적으로 둘의 사이를 지지해 주었다.

그때의 어색한 식사가 기억에 남는 건 처음 가보는 식당에 어머니가 한껏 차려입고는, 딸아이의 첫 남자친구에게 밥을 사주던 그 광경의 어머니가 나에게는 어색하기도 마냥 먹먹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혹여 딸아이가 무시당하거나 나쁜 눈초리를 받지는 않는지 그게 자신의 허물 때문은 아닐지 걱정하며 나에게 물었던 마음과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 정작 당신은 별로 드시지 않았으면서 계속 그릇을 우리 쪽으로 밀어주던 응원의 마음이 아직도 오래 켜켜이 남아있다.

월요일 연재
이전 07화꿀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