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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시 Mar 21. 2017

그래서, 조용한 슬픔은 무뎌지긴 하는 것이다

고수리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속 책갈피

'시간은 쉼도 없이 흐른다. 그래도, 아니 그래서, 조용한 슬픔은 무뎌지긴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신비한 특성이 있다. 그 중 가장 다행스럽고 놀라운 한 가지는, 행복한 기억보다 괴로운 기억을 더 잘 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기억미화’라고 부르는 현상은 그래서 일어난다. 우리는 행복해 지고 싶으니까. 지난 추억을 꺼낼 때, 적어도 차분한 미소는 가지고 있고 싶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깊게 박힌 슬픔은 잘 잊혀지지 않는다. 슬픔의 기억은 평소에는 서랍 속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다가, 내가 서랍을 열고 다른 무언가를 찾을 때쯤 내 손등 위로 기어 올라오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소한 일상 속, 지극히 평범한 어떤 장면에서 슬픔을 마주한다. 그 순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나 혼자 조용히,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 순간을 우두커니 지낸다.

고수리의 에세이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에서 딸은 인연을 끊은 아버지의 기억과 가끔씩 마주한다. 시간과 함께 기억의 형태는 달라지고, 미운 감정은 몇 년이라는 시간 사이에 희석된다. 사라지진 않되 옅어져는 가는 기억 속에서, 문득 그녀의 심장을 쿵, 치고 지나가는 것은 한 때 아무런 의미를 갖지도 못했던 사실들이다. 대충 만든 도시락에 고맙다고 말하던 아버지의 기억. 어떤 순간 물밀듯이 밀려와 인지되는 부재의 고통. 때때로 아무렇지도 않았던 순간은 시간이 지나서야 진짜 의미를 보여주곤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은 흘러간다. 새로운 기억이 쌓여서일까, 무수한 새로운 관계 속에 놓여서일까. 슬픔은 슬픔 그대로 있되,더 이상 눈물샘에 바늘을 꽂지는 않는다. 그를 우리는 무뎌짐이라고 부른다. 이는 우리에게 가장 다행스러운 동시에, 어쩌면 가장 슬픈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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