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 <앤디 워홀의 철학> 속 책갈피
"테이프 레코더를 갖게 되면서, 그것이 어떤 것이었건 간에, 내 삶의 감정적인 부분은 완전히 끝났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끝나는 것을 보는 것이 기뻤다. 아무것도 다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란 그저 좋은 테이프였고, 하나의 문제가 좋은 테이프로 변형되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문제는 재미있는 테이프였다.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알았고 그 테이프 녹화를 위해 움직였다. 사람들은 그 테이프에서 어떤 문제가 현실이고 어떤 문제가 과장되었는지 말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는 그래도 사람들에게 문제를 말해 주었던 사람들도, 그들이 진정으로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그들이 그냥 행위를 하고 있는지 더 이상 알지 못했다. (앤디워홀의 철학 / 40쪽)"
흔히 예술이 슬픔 같은 감정을 승화시키는 데에 좋다고 말한다. 내가 이 사실을 깨닫게 된 것(단순히 알게 된 것이 아니라 깨닫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그때 나는 일련의 좋지 않은 일을 겪었는데, 그러면서도 행복에 대한 강박 때문에 나는 행복해, 나는 행복해, 하고 몇 번을 되뇌이곤 했다.
내가 사실은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그 사실은 내게 적지 않은 충격이 되었고, 나는 홀로 책상 앞에 앉아 내가 왜 행복하지 않은지 노트에 적었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왜 나만 이런 것을 신경써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그러다가 그걸 그냥 목록으로 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시로 써 보았다. 나는 그때 지금보다도 더 어렸기 때문에 온갖 마음을 다 쏟아 부을 수 있었고, 그것에 살짝의 형이상학적 수식도 보탤 수 있었다. 물론 그 때 내가 쓴 시들의 의미를 지금의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때의 나도 정확히 알지 못했던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때 난 확실히 이렇게 생각했다.
내게 일어난 슬픈 일들은 모두 나의 문학적 양분이 될 거라고.
모든 일은 겪어 보는 것이 겪지 않은 것보다는 더 생생하다. 슬프고 아픈 일에 있어서도 그랬다. 내가 슬픔의 끝자락, 절망의 밑바닥에 손끝이라도 닿지 않았다면 나는 그런 감성과 감정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겪는 모든 일들이 내가 쓰는 글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게 일어난 일련의 일들과 내가 느꼈던 일련의 슬픔은 나라는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 서술하는 방식, 그리고 서술되는 방식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했다. 슬픔을 내 자산으로 인정하는 일은 역설적으로 내가 슬픔에서 빠져나오게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나는 종종 슬퍼지고 싶었는데, 슬픈 상태에서 내 얘기를 하고, 그를 시, 글이라는 형태의 가시적인 것으로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형도의 <빈 집>에서 온갖 열망과 감정들이 시와 함께 빈 집에 갇히듯, 내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것은 그 시 속에 갇혔다. 그리고 나는 그다지 슬프지 않게 되었다.
앤디 워홀은 '문제란 그저 좋은 테이프였고, 하나의 문제가 좋은 테이프로 변형되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테이프 레코더 앞에서 벌이던 숱한 대화들은 예술이 된 행위일까, 예술을 위한 행위일까? 마찬가지로 내가 느끼던 많은 감정들은 글을 위한 감정이었을까, 글이 된 감정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