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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시 May 14. 2017

그들에게만 특별하고 남들에게는 평범해야 하는

윤이형 <루카> 속 책갈피

나는 잠시 그대로 있었고 너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나는 몸을 원래대로 돌리고 한쪽 귀에 이어폰을 도로 꽂았다. 이어폰에서는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케이팝 최신곡이 쿵쾅쿵쾅 울리고 있었다. 드라마 다운로드 상태로 다시 확인하는데 천천히 코가 매워지기 시작했다. 눈물이 만들어져 모이고 있었다. 그냥 너를 보고 있다가 등을 돌려 하던 일들을 계속한 것뿐인데 방금 전 내가 한 단순한 동작들의 연속이 왜 그렇게 서글픈지 알 수 없었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대화는 잘못 깎은 연필심처럼 끊겨나갔다. 그러지 않았던 날들이 생각났다. 아무것도 아니야, 따위의 말이 나오지도 않았고 설령 그런 말이 나온다 한들 거기서 허망하게 대화가 끝나버리는 일도 없었으며 방에서 음악을 들을 때 서로에게 방해가 될까 봐 이어폰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윤이형, 루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은 그들에게만 특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해야 한다. 그 사랑을 둘러싼 다른 것들이 비판이나 비난을 받게 되더라도, 사랑 자체는 타인에게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어떤 사랑을 평범하다고 인정하지 못하곤 한다. 윤이형의 소설 <루카>에도 그런 사랑이 등장한다. 퀴어 커뮤니티에서 만난 루카와 딸기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그들의 이야기를 정말 평범하게, 다른 어떤 형태의 연애와 사랑과 다르지 않은 당연하고 평범한 것으로 다룬다. 똑같이 사랑에 빠지고, 똑같이 이별의 과정을 겪고, 똑같이 아파한다. 아침에 도서관에 앉아 책을 펴들고 있던 나는 그들의 사랑 역시 똑같다는 생각에 마음으로 공감했다. 어쩌면, 공감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 소설을 읽었던 저녁, 너를 만났다. 우리는 인간관계란 정말 어려워, 하는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때 너는 나에게 두 가지 비밀을 말해주겠다고 했다. 누군가가 나에게 비밀을 들려준다고 했을 때 내가 항상 보이던 반응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왔다. 네가 얘기하고 싶으면 말해줘. 그 말과 함께 머릿속에서는 이런 질문들도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비밀을 들으면 나의 비밀도 말해 주어야 할까? 내 앞에 앉은 너의 비밀이 가지는 무게로부터 내가 도망갈 구실을 남겨놓을 수 있을까? 나는 너의 비밀을 들을 자격이 있을까? 너는 첫 번째 비밀을 말했다. 두 번째 비밀을 말하기 직전, 나는 그것이 너에게 특별한 것임을, 그리고 나에게는 평범한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특별한 것으로 느끼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네가 두 번째 비밀을 말해 주었을 때, 나의 반응은 어땠더라?


너는 놀랐어? 하고 물었다. 나는 그 질문에도 뭐라고 답해야 할지를 몰라 그저 너의 눈을 보았다. 사실 나는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놀라지도 않았고, 등골이 서늘해질 만한 쇼크를 받지도 않았고, 내 머릿속에 떠오른 첫 한 마디는 그냥 '그렇구나', 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반응이 원래 나의 것인지, 아니면 나의 이성이 꾸며낸 것인지 마저 알 수가 없었다. 너는 놀랐어? 하는 질문을 던진 채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놀라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질문에 대한 긍정과 부정 중 어떤 것이 너에게 더 좋은 반응이 될 것인지 판단하는 데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그래서 나는 네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할 때까지, 미소를 띤 표정밖에 지을 수 없는 기계처럼 너의 눈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말을 썼다 지웠지만, 맞장구를 제외한 어떤 말도 혀끝으로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 후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하나하나에서, 나는 내가 이런 일에 얼마나 말 뿐이었는지를 느꼈다. 모든 발언에 편견을 경계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었고, 모든 생각에 열려 있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앞으로의 관계에 미묘함이 개입될까 두렵기도 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도 나에게 있어 너라는 사람은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너를 달리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학습된 의문마저 들었다. 내 내면 어딘가에서는 이런 말도 들렸다. 이런 소설을 읽은 날 너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듣다니.


너는 이야기를 시작할 때 말했다. 사실 이렇게 말하고 나서도 집에 가면 후회할지도 몰라. 들으면 날 싫어하게 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 관계는 처음부터 아니었다고 생각해. 너는 이야기를 끝내는 순간 한 번 더 말했다. 네가 나에게서 점점 멀어질지도 몰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비밀을 말해주어 고맙다거나 하는 수많은 나의 소감과 감상에 관해 무언가를 더 말하지는 못하고 그냥 '아니야!' 하고 외쳤다. 아니야, 그 사실 때문에 뭔가 변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내 반응이 과장처럼 보이지 않을지 걱정했고, 과연 내 반응이 정말 내 것이 맞는지 혼란스러웠다.


그날 너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어딘가 예민해져 있었다. 예의를 제대로 차린 것도, 차리지 않은 것도 아닌 미묘한 반응만 보였던 나에 대한 실망감, 너의 비밀을 들은 후에도 막상 내 비밀은 선뜻 얘기하지 못했던 죄책감, 앞으로 내가 생각 없이 보이는 어떤 행동이 너에게는 내가 달라져 버린 것으로 보이지 않을까, 내가 연락을 하면 널 일부러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 그러한 감정들이 온 시간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너와 변함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너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단지, 평소에 너를 떠올리지 않던 곳에서 너를 떠올릴 뿐이다. 최근 화두에 오른 정치 토론 주제를 들으며 그날의 네 표정을 생각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지나가는 농담을 보며 네가 했던 말들을 생각한다. 사람들이 자신 있게 찬성과 반대에 대한 의견을 늘어놓을 때,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당혹감과 그것이 너에게 주었을지도 모르는 상처를 생각한다.


누군가의 찬성과 반대가 한 사람에게는 삶에 대한 긍정과 부정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지금은, 이러한 모든 얘기가 그저 남의 일, 관념 속 어딘가에만 존재하는 일이 아님을 안다. 그리고 말하지 않을 뿐, 누구나 그러한 이야기를 일상으로 가질 수 있음을 안다. 모든 사랑이 그렇듯 그들에게는 특별하지만, 남들에게는 평범한 것이 되어야 할 일상이다. 나의 일상에 누군가 왈가왈부 할 수 없듯, 그것은 정말 그들의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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