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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시 Jun 19. 2017

언어가 있어도, 없어도, 내 맘은 너에게 들릴 거야

정용준 <떠떠떠, 떠> 속 책갈피

말을 더듬는다는 문장은 잘못된 표현이야. 말은 물리적인 방식으로 더듬어서 입술 밖으로 빼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거든. 형체가 없거나 혹은 너무 커. 입속에 넣어 굴리던 얼음이 녹아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뱉어내지지가 않아. 말은 입속에서 제 형체를 잃어버리지. ... 방구석에 혼자 앉아 되지 않는 발음을 수도 없이 연습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했어. 이렇게 마음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한 말이 왜 입술 밖으로는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 걸까.

그런데, 내 맘이 너에게 들릴까?    <떠떠떠, 떠> p.20                                                                                                      


                                                                                                                                                                        

"모음이 사라지길 원해. 혀끝이 입술에 부딪치지 않고 발음되는 단어들, 입천장에 혀가 닿지 않고 태어나는 부드러운 언어들, 입술 사이에 암초처럼 걸려 빠져나오지 않는 커다랗고 단단한 단어들, 이런 것들이 사전과 인간의 기억에서 모조리 지워졌으면 좋겠어."


말을 더듬는 남자와 갑자기 발작 섞인 잠에 빠져드는 여자의 사랑을 그린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모음이 사라지길 원해. 그리고 결국 모음을 담은 한 단어를 말하고, 들으면서 끝난다.


오감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오감 만으로 이해하기 힘든 세상이 있다. 세상에는 무수히 '합의된 형식'이 있다. 우리는 이 합의된 형식을 어길 때, 넘을 때, 따라오지 못할 때 조소 혹은 연민을 던지곤 한다. 말은 대표적인 형식이다. 모두가 합의하고 있는 방식. 자음 하나와 모음 하나가 만나 글자를 만들고, 글자들이 모여 단어가 되고, 단어들이 모여 문장이 된다. 누군가 자음에 부정확한 모음을 붙이거나, 제대로 되지 않은 엉뚱한 단어를 붙이거나, 한 마디를 말하기 위해 아주 느린 시간을 활용한다면 그는 조소 혹은 연민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어떠한 조소도, 연민도 없이, 오로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말과 그 마음을 전하고 전달 받는 사람만이 있다. 이 세상을 나는 이해할 수 있을까? 말이 어떠한 부수적인 것도 제외한 메시지로서 기능하는 세상을 내가 알 수 있을까? 연민과 동정을 모두 백 퍼센트 지우고, 그들을 오롯이 그들로 대할 수 있을까? 지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 될 지도 모른다.


어떤 연민도 지우고 오직 사랑만으로 서로를 대하는 이들의 세계가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역시 판타지적 오만일까? 아니면 똑같은 그들을 위한, 똑같은 마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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