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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시 Aug 28. 2017

당위의 덫

현상과 당위의 사이에서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갔던 친구 A가 돌아왔다. 워낙에 쌓아둔 이야기도 많고 자기 색깔도 분명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항상 즐겁던 친구다.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A가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평등을 중시하고 인권 의식 또한 높은 사람. 그러나 A는 그와 함께 있으면 어딘가 불편해 진다고 했다. 왜일까?

Photo by Abdullah Öğük on Unsplash

A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몇 년 전의 기억을 더듬게 되었다. 교육에 관한 수업을 듣던 중이었다. 그 날의 주제는 '이상(abnormal)의 기준이 무엇인가'였다.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이상을 판단하는데 사용해 온 여러 가지 기준 중 하나는 사회 속의 문화적 영향이다. 그 예시 중 하나가 성소수자였다. 교수는 그들이 특정 사회 안에서 문화의 눈에 따라 이상으로 비치곤 한다고 설명했다.     


그때, 한 친구가 손을 들고 반론을 제기했다.     


"이상의 예시 중에 성소수자가 있으면 안되는 것 아닌가요?"     


그 친구의 주장은 이런 것이었다. 성소수자는 이상이 아니며, 이는 정상과 이상을 가릴 수도 없는 당연한 사실이다. 이것은 어떤 사회이든, 어떤 문화적 배경을 가졌든 똑같이 적용된다. 그러므로 특정 문화 안에서 그들이 이상으로 비친다는 예시는 적절하지 않으며, 그들을 더욱 더 이상의 프레임 안에서 보게 할 뿐이므로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 친구 역시 평소 평등을 중시하고 인권에 대한 관심이 많던 사람이었다. 일단 성소수자가 이상이 아니고 그것이 당연하다는 말은,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서 더 이상 일방의 주장이 아닌 사실의 영역에 들어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친구의 말은 어딘가 이질적이었고,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들렸고,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왜일까? 내내 그 이유를 생각했고, 수업이 끝나고 나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런 논리가 아니라는 교수의 설명에도 계속 반론을 제기하던 그 친구는 마치고 나서도 화가 난 얼굴이었다. 친구는 '예시로 어떻게 그것을 사용할 수 있냐'며 끊임없이 교수의 생각 없음을 욕했다. 내가 생각한 교수의 의도를 말해주고 싶었지만, 말을 꺼내려고 하자 그 친구는 나에게까지 바짝 선 날을 드러냈다. 그때 그 친구에게는 자신의 의견에 반대되는 어떤 말이라도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왜 그 친구의 말이 불편했을까? 왜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나는 그 답을 혼자 삼키고 혼자 생각을 이어나갔다. 내가 내린 답은 그 친구가 현상과 당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교수가 말한 것은 현상이었다. 특정 시대 안에서 이미 벌어진 현상, 성소수자를 이상으로 보던 사회는 그 당위성에 상관없이 이미 존재했다. 그 현상의 기저에 깔린 논리에 대한 옳고 그름을 주장할 수는 있지만, 그러한 논의는 미래의 방향을 결정할 뿐이다. 이미 존재하는 현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교수가 말한 것은 현상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친구는 현상의 기저에 깔린 논리의 당위성을 지적했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종종 현상과 헷갈리곤 한다. 앞서 말했던 A의 지인 역시 비슷한 경우다. 인권의식도 높고 박혀 있는 생각도 올곧은 편이라는 지인, 그러나 대화하고 있으면 불편해진다던 지인. 그 지인의 경우 이러한 식이었다. 가령, 좋아하는 여성이 있는 어떤 남자가 '사회적인 인식이 있다 보니 자신이 먼저 고백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든다'고 그 지인에게 말했다. 여기서 '고백을 남자가 해야 한다'는 것은 당위의 문제로, 이것에는 명백히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백을 남자가 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다'는 것은 현상의 문제다. 그로 인한 압박감을 느낀다는 것도 당위가 아닌 현상의 문제다. 그러나 A의 지인은 이에 대해 그건 잘못되었다, 네가 그렇게 느낀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고 반론을 제기한다는 것이다.     


현상의 기저에 깔린 논리가 잘못되었으니 앞으로는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자, 고 조언과 설계는 할 수 있겠지만, 이미 일어나 버린 현상 자체는 옳고 그름을 따질 수가 없는 사실일 뿐이다. 하지만 이는 종종 구분하기 까다롭고, 누군가 구분을 하지 못했다고 하여 섣불리 지적하기에 조심스럽고 위험한 문제다. 차별 혹은 평등과 관련한 문제면 더욱 그렇다. 그런 만큼 스스로가 이를 구분해야 함을 알고, 당위의 덫에 갇히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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