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땠어요?] 고민하지 않고 행동하는 인간의 위대함 <아틱>
국내에서도 꽤나 많은 팬을 보유한 대표적인 미중년 매즈미켈슨의 새 작품이 개봉했습니다. 북극에서의 생존기라는 다소 식상하고 어려운 소재를 어떻게 풀었을지 걱정반 기대반이었습니다. 상영 횟수 자체도 엄청 적더군요. 금세 극장에서 사라질 것 같아 서둘러 보고 왔는데 옳은 선택이었지 싶었습니다.
북극에서 가까스로 생존하고 있는 비행기 승무원 오버가드(매즈미켈슨 분)는 나름 규칙적인 생존 전략을 세우고 지키며 하루하루 버티고 있습니다. 손목시계 알람을 맞춰놓고 제시간에 구조신호를 눈 위에 그리고, 수동으로 작동하는 신호기를 돌리는 등 방학 계획표처럼 빡빡한 일정이죠. 그렇게 신호기를 돌리던 중 한 구조헬기가 오버가드에게 다가옵니다. 오버가드는 온 힘을 다해 소리치고 헬기는 악천후를 뚫고 오버가드에게 다가오죠. 그 순간 거센 눈보라에 휩쓸린 헬기는 멀리 추락해 버리고 오버가드는 절망 속에서 헬기를 향해 뛰어갑니다.
장르라는 구분은 슈퍼히어로의 경우처럼 기대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꺼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클리프 행어>로 대표되는 산악영화의 규칙은 재난영화나 공포영화처럼 너무 뻔한 것으로 예상되기도 하며 그 장르에 대한 편견을 만들어내기도 하죠. 저도 <아틱>을 보기 전에는 그런 편견 때문에 망설여졌습니다. 무너지는 눈덩이와 아슬아슬한 로프 타기, 떨어지는 동료와 생존 사이의 딜레마 등등 '뭐 별거 있겠어?' 하는 편견이 저한테도 존재했습니다.
<아틱>은 제 이런 편견을 교묘하게 잘 비껴갔습니다. 산악 영화나 생존 영화가 가지는 특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과감한 생략과 호흡이 작품을 지루하지 않게 끌고갑니다. 먼저 산에 오르는 이유나 조난의 과정 등 순차적 구성을 과감히 벗어 던집니다. 마치 옆에서 오버가드를 지켜보는 것처럼 카메라는 첫 씬부터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는 오버가드를 비추죠.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 상황을 구성하도록 유도합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저 생활이 익숙한 걸 보니 꽤 지났군... 저 장치는 뭐지? 아! 낚시 도구구나 저건 뭐지! 아 그거구나!' 글로 표현하자면 이런 식입니다. 이렇듯 마치 소설을 보는 듯 빈공간을 주는 연출 방식은 <아틱>의 큰 재미로 작용합니다. 감정을 이끌 순간에만 치고 빠지는 음악과 아이슬란드의 눈을 황량하면서도 아름답게 찍어낸 카메라는 이 연출을 훌륭히 받쳐주고 있습니다.
앞에 훌륭한 연출로 자신의 도구를 두둑이 챙긴 영화는 채 30분이 지나지 않아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내기 시작합니다. 누가 봐도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서 오버가드는 '공존'을 실행합니다. 불시착한 헬기로 다가간 오버가드는 냉정하리만큼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치명상으로 정신을 잃은 여자 승무원을 살릴 방법을 고민하죠. <아틱>에선 우리가 흔히 재난영화에서 발견하는 '나를 보호할 것인가 죽을 위기의 누군가를 보호할 것인가' 따위의 고민은 강조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사람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고민하고, 이내 행동하는 것을 관객이 지켜보게 만듭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마치 원래 그랬다는 듯이 말이죠.
대부분의 영화이론에서 캐릭터는 큰 변화를 맞이해야 합니다. 그래서 못나고 평범한 캐릭터가 위대한 영웅이 되는 이야기를 우린 자주 만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틱>은 그 규칙을 묵묵히 부수어내지만 이내 자신의 규칙을 만들어냅니다. 사람으로서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당위성과 변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방법에 대한 고민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틱>은 호소합니다. 이런 <아틱>의 메세지는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해져 후반부엔 자연스레 관객 모두 오버가드가 되어 간절히 구조를 바라게 됩니다. 알고 있지만 간절하게, 믿고 있지만 설마 하며 해피엔딩을 원하게 되죠. 극 초반 함부로 관객의 개입을 둑처럼 막아놓던 영화는 후반에 둑 자체를 부숴버립니다. 한없이 밀려드는 절망감과 간절함의 홍수로 오버가드와 관객을 한 배에 태우고 엔딩으로 흘러갑니다. 눈처럼 하얗고 때론 치명적인 몰입감이었습니다. 여기서는 거친듯 섹시하게 나오는 미중년 매켈슨과 한배를 타시길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