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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간감 Nov 06. 2020

[어땠어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리뷰

유쾌하지만 침착하게, 신중하지만 대담하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장기화된 코로나 사태로 찬 바람이 불던 극장가에 새로운 작품이 찾아왔습니다. <전국노래자랑>과 <도리화가>의 감독이자 배우로 알려진 이종필 감독의 신작이자  90년대와 여성, 내부고발이란 독특한 소재로 입소문을 타고 있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입니다.


 삼진그룹 생산부의 주축 아닌 주축 자영(고아성 분)은 여상 출신 고졸 사원이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입니다. 불편한 유니폼을 입고 커피를 타면서도 주변을 살뜰히 챙기는 순진한 오지라퍼죠. 만년 고졸 사원이지 않을까 고민하던 찰나 회사에선 토익반을 만들어줄테니 3개월 내에 600점을 넘으면 꿈에 그리던 대리 승진을 시켜주겠단 제안을 합니다. 해박한 지식과 추리소설을 사랑하는 프로지적러 유나(이솜 분), 수학 올림피아드 출신 수학 천재 보람(박혜수 분)과 함께 영어공부에 열을 올리던 자영은 뜻밖에 풍경을 목격합니다. 어쩔줄 모르는 자영은 둘에게 자신이 본 문제들을 털어놓고 셋은 수상한 회사를 파헤쳐보기로 결정하죠.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관객을 만나자마자 자신의 가장 강력한 패를 던지는 영화입니다. 개봉 2주 차를 지나는 지금 가장 흔하게 들리는 평은 바로 배우와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 홍보를 위한 방송 출연을 사람들이 반길 정도로 고아성, 이솜, 박혜수 배우의 케미가 두드러지고 이런 장점은 작품 내적인 캐릭터 자영, 유나, 보람에도 그대로 그 바통을 이어갔습니다. 극의 대부분의 상황을 이끌어가는 오지라퍼 자영과 시니컬 하지만 똑 뿌러지는 유나, 혼자 흐름 못맞추고 뭔가 느린 듯 하지만 천재적인 보람. 이 세 명의 캐릭터플레이가 이 영화의 전반적인 '호감'을 담당합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익숙함이 느껴지신다면 그게 맞습니다. <삼국지연의>의 그것, <태조왕건>의 그것, <위베어베어스>의 그것, <삼총사>의 그것이 맞습니다. 익숙한 듯한 이 풍경이 조금 특별해지는 지점은 한국 영화에서 자주는 다뤄지지 않았던 여자들의 우정을 다뤘다는 점과 미술팀의 피땀눈물이 느껴지는 완벽한 90년대 풍경의 소환입니다. 좋은 재료로 만들어진 훌륭한 결과물인지라 굳이 작품의 외투 안을 들춰보지 않아도 그 아우터 만으로 충분히 즐길만한 요소가 가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선택한 가장 큰 재료는 바로 '내부고발'이었습니다. 사회성이 짙고 어떤 방식으로든 다루는 게 만만치않은 잘해야 본전 소리 듣는 까탈스런 재료죠.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이런 재료의 까다로움을 앞에서 언급한 자신만의 장점으로 우직하게 돌파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작품은 뜬금없이 목숨이 오가는 문제로 급물살을 타거나, 배신이 난무하거나 하는 극적인 순간으로 함부로 관객을 이끌지 않습니다. 캐릭터 플레이에 중점을 둔 작품의 공기를 그대로 머금고 그 톤이 흐트러지려는 순간마다 잘 고삐를 쥐어 맸습니다. 유쾌하게 뛰어들지만 침착하고, 신중하게 접근하되 대담한 방식으로 작품 안의 문제들을 풀어나갔습니다. 다소 판타지스럽게 얽힌 문제들을 풀어가는 부분이 존재하고 <스포트라이트> 같은 고발 영화가 가진 특유의 깊이감을 가지진 않았습니다. 제가 깊이감을 가지지 '못했다'가 아니라 '않았다' 표현한 이유는 이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만의 방식으로 선택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몇몇 분들은 동의하지 않으실 테지만 저는 이런 판타지가 작품의 메세지와도 닿아있으며 충분히 용서가 가능한 선택이라 확신했습니다.


90년대가 가진 시대의 어두움과 직장 내 여성 문제, 내부고발 등은 이 영화가 가진 가장 강력한 구심점입니다. 이런 전반적인 구조를 준수하게 잘 다뤘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영화를 사랑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사람을 다루는 방식'에 있었습니다.  어마무시한 대기업으로 표현된 만큼 주인공 셋은 삼진그룹 내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부딪치는 과정을 겪습니다. '내부고발 이야기'에 흔히 등장하는 소시오패스 상사와 뒤에 있는 검찰, 국회의원 같은 공식들을 생각하셨다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자신이 다루는 폭풍우의 크기를 적확하게 인식하고 닻을 내려 삼진그룹의 '보통사람들'에 주목했습니다. 자영과 유나, 보람이 해쳐나가는 문제와 그 속의 용의자들은  수사가 거듭되며 악랄한 개인으로 바닷속에 잠기지 않았습니다. 90년대와 대기업, 내부고발이라는 커다란 시대의 해일 속에 그들이 어디로 떠가고 있는지를 영화는 악착같이 놓치지않으려 했습니다. 시스템 속에서 시나브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된 '사람들'을 조명하겠다는 작품의 포부는 유쾌함이라는 동아줄로 단단히 자신을 묶은 채 작품 속 인물들의 손을 붙잡았고, 끝끝내 수면위로 올려냈습니다.


최근을 넘어 제가 봐왔던 한국 영화 중 이렇게 잘 조율된 시나리오와 연출로 관객을 만난 작품이 몇 개나 될까 싶을 정도로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제가 언급한 작품의 '방식'이 사람마다 다르게 느껴지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꼭 극장에서 확인하시는 걸 권하고 싶네요.



추신 하나.

작품 내내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이 '보통사람'들에 대한 애틋함은 나아가 한국사회의 약자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이기도 했습니다. 페놀유출사건이라는 작품의 소재가 된 사건과 관련이 없지만 그런 흔적들은 곳곳에 알알이 박혀있죠. 내부고발자를 내쫒기 위해 복도에 내어놓은 책상, '여상'출신 직원들의 아침업무, 노조를 대하는 임원의 한두 마디, 론스타와 외환카드 사태, 가습기 살균제 문제 등 작가와 감독, 스태프들이 얼마나 오래 한국사회의 등잔 밑에 눈과 마음을 두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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