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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간감 Mar 27. 2022

말빨이 살아있는 오늘의 연애 <연애 빠진 로맨스>

[어땠어요?] 말빨이 살아있는 오늘의 연애 <연애 빠진 로맨스> 리뷰

4년 5년 전 <비치온더비치>와 <밤치기> 같은 작품이 화제가 되곤 했습니다. 한국 영화에서 성에 관련된 이야기를, 그것도 독립영화에서, 뻔뻔하지만 밉지 않은 유머 코드로 풀어낸 작품들이었습니다. 상업 영화가 아니기에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여자 홍상수'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정가영 감독의 스타일은 알만한 사람은 아는 무언가로 떠오르기 시작했죠. 범상치 않은 정가영 감독의 첫 번째 상업작품이 1달째 극장에서 선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와플 가게를 도우며 팟캐스트를 기획하고 있는 자영(전종서 분)은 매일 욕구불만에 시달립니다. 20대 후반, 그렇다고 결혼 생각이 있거나 심지어 연애 생각조차 없는 자영은 고난이도 감정노동을 덜고 그냥 가볍게 누군가를 만나고 싶을 뿐이죠. 잡지 편집부에서 일하는 우리(손석구 분)은 편집회의에서 깐깐한 편집장(김재화 분)의 강요에 가까운 권유로 섹스 칼럼을 써야 하는 상황입니다. 자영과 우리는 각자의 니즈로 데이팅 어플 오작교미를 깔고 서로를 만나기로 합니다.


<연애 빠진 로맨스>는 잘 만든 상업 영화가 그렇듯 현대의 풍경을 적확하게 잡아낸 영화입니다. 마냥 첫사랑 같은 사랑을 꿈꾸기엔 청춘의 한 치 앞은 너무나도 어둡습니다. 소설가를 꿈꾸던 우리는 원하지 않는 잡지 편집부 일을 하지만 이런저런 사람에게 이용당하고 치이기 일쑤고 그런 우리를 흑우라고 놀리는 자영은 모종의 이유로 어렵게 붙은 대기업 방송사를 퇴사하고 무시무시한 빚을 떠안고 살고 있죠. 영화는 '한창 연애할 나이'의 인간상을 구질구질함과 발칙함 사이에서 균형감 있게 그려냈습니다. 마치 '여러분 다 알고 있으니까 힘들지 않게만 언급하겠다'고 말을 거는 느낌이었습니다. 적어도 알바를 하면서 아파트 크기의 원룸에서 살거나 중소기업에 다니면서 신형 중형차를 끄는 몇몇 컨텐츠 특유의 농간은 없었습니다.


위에서 잠시 언급했던 그 기분 좋은 발칙함의 원동력은 바로 대사입니다. 최근 개봉했던 그 어떤 한국 영화를 통틀어서 가장 대사가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전종서 손석구 두 배우의 소화력이나 에드립이 분명 있었단 것을 인정하면서도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씬의 상황설정이나 핵심이 되는 대사들은 뻔한 표현이지만 착착 감깁니다. 특히나 2막으로 넘어가기 직전 두 사람이 이자까야에서 만나는 씬은 한국 로코물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좋았던 씬으로 꼽고 싶습니다. 멀리서 지켜보던 두 사람이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지는 그 순간을 가장 영화답게 옮겨놓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씬을 보기 위해 극장에 가셔도 된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을 정도에요.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마무리하고 싶은 <연애 빠진 로맨스>의 포인트는 바로 여성 캐릭터에 있습니다. 한국 사회를 아직까지도 통째로 뒤흔들고 있는 페미니즘 이슈를 제하고 보더라도 한국 영화가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데 서툴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의외로 그 원인은 여성 캐릭터를 그저 '수동적으로 도움을 받는 캐릭터로 그린다' 같은 단순한 도식으로 판단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캐릭터가 매력을 발산하는 방법은 정말 수천 수만가지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그런 의미에서 자영의 캐릭터는 전달 가능 한 범위의 주체적 여성 캐릭터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쏟아내고 추해지고 실수하며, 사랑하고 반성하는 자영은 진창에 뒹굴기 때문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근처에서 볼법한 인간적인 면모를 미간이 찌푸려지지 않게 그려내는 것은 아주 쉽지 않은 성취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의 뒷부분이 다소 힘이 빠지는 아쉬움이 없지 않습니다. 제 리뷰에서 자주 언급했던 인간으로서의 성장담이 쭉 뻗어 나가려다 만 느낌이 분명 있습니다. 자영의 할머니(김영옥 분)와 아버지(김광규 분) 같은 서브플롯의 마무리도 분명 아쉬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에서 한국 로코가뭄이 오래된 요즘 아주 시원한 작품이었습니다. 아직 극장에서 버티고 있으니 응원하는 마음으로 확인하셔도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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